내 '인생절경'은 속리산 너머 어디메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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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의 봄(이원수 작사 · 홍난파 작곡)이라는 노래처럼 봄은 꽃 피는 산골에서 체감할 수 있다. 내 고향은 봄이 되면 산과 들, 마을과 강둑 할 것 없이 수많은 꽃을 피워내는 경북 상주다. 봄이 돌아오면 고향의 음식을 못내 맛보고 싶어지게 마련이어서 일이 없어도 차를 몰고 고향을 찾곤 했다.

속리산 자락에 숨은 은거지, 경북 상주 우복동

속리산 자락에 숨은 은거지, 경북 상주 우복동

찾아갈 고향이 있는 것 자체가 축복인데 한반도의 깊은 속살이라 할 수 있는 내륙의 부드러운 길을 느긋하게 따라가면서 약간의 허기와 함께 고향의 음식, 고향의 벗들, 산천경개를 미리 상상하는 것 역시 행복이라 할 만했다.

소설가 성석제 추천, 경북 상주 우복동

나의 ‘인생 절경’이라 할 만한 그곳은 충북 괴산의 청천면에서 속리산 서쪽의 지방도를 타고 달천과 만나고 헤어지는 것을 반복하며 남쪽으로 가던 중에 만났다. 산모퉁이를 돌던 중에 문득 진달래가 꽃밭을 이루며 무더기로 환히 피어 있는 것이 광휘로운 봄과 생명의 오케스트라의 총주(tutti)를 듣는 느낌이었다.

본디 진달래는 음지식물이라 산비탈의 그늘진 곳이나 다른 나무 아래에 피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그곳은 산굽이를 돌 때마다 새로운 연극 무대가 펼쳐지듯, 적멸에 가까운 고요함 속에 분홍 진달래 위로 봄철 한낮의 광명이 환하게 내리쬐고 있는 것이었다.

처음 그걸 보았을 때는 어린 시절 낯선 동네에 잘못 갔다 그 동네 아이들과 맞닥뜨린 뒤 복부를 한 대 얻어맞은 소년처럼 신음을 내며 차를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복통은 내가 그곳이 내 고향이 아닌 충북 괴산, 보은인 줄로 알고 부러움과 질투에 사로잡힌 데서 기인했다. 상주의 경계가 속리산 서쪽까지 뻗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건 30대 중반 이후의 일이었다.

연분홍빛 진달래 꽃잎으로 만들어진 꽃밭, 아니 꽃대궐의 정원이 하나씩 나올 때마다 어린 시절 손에 주전자를 들고 참꽃(진달래의 다른 이름) 따러 다닐 때를 떠올렸고 그때 그 동무들은(특히 빨간 내복을 외출복 겸 등산복으로 입고는 산으로 들로 야생마처럼 뛰어다니던 여자아이들은) 지금은 뭘 할지 생각해 보고 언젠가 그때를 그리워하리라고 상상했던 어린 나를 그리워했더랬다.

도무지 속세 같지 않은 길을 지나 속리산 뱃속으로 들고 관통도로를 넘어가면 상주시 화북면 면소재지가 있었다. 동북쪽의 청화산으로 방향을 잡으면 조선 최고의 지리서인 ‘택리지’를 쓴 청화산인 이중환이 택지로 골라 기거한 복된 마을, 소(牛)의 배(腹)처럼 풍요롭고 깊은 골짜기로 지리산의 청학동과 함께 지상의 유토피아로 지목되는 우복동이 나온다. 입구에 은밀하고 살기 좋은 산중비처를 의미하는 ‘동천(洞天)’이라는 단어가 적힌 바위가 서 있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니 비슷한 위도의 속리산 너머 서쪽은 사담동천(沙潭洞天)이었다.

배는 전혀 아프지 않았다. 잉잉대는 생명의 약동, 그윽한 봄날의 향훈에 지리적 경계며 내남의 고향을 따지는 게 무슨 소용이랴.

성석제(소설가)

작가 약력
1960년 경북 상주 출생
1986년 문학사상 『유리닦는 사람』으로 등단
소설로 『투명인간』『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조동관 약전』『호랑이를 봤다』『왕을 찾아서』 등 다수.

‘이효석문학상’ ‘동인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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