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39살에 세 번째 직접 투표해보는 대한민국 청년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저는 39살, 대한민국 청년입니다. 오는 5월 대통령선거가 제 생애 제 손으로 하는 세 번째 투표가 될 것 같습니다. 제가 뇌성마비를 앓고 있기 때문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장애를 안았습니다. 19살이 되던 해에 가족을 떠나 소위 '시설'로 불리는 요양보호시설로 가야 했습니다. 누워있기만 하는 와상 환자로 분류됩니다. 시설에서는 '거소투표'라는 이름의 부재자 투표를 해왔습니다. 하지만 제 의사와는 무관하게 이뤄졌습니다. 직접 내 뜻대로, 내 생각대로 한표를 행사한 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시설 측에서 거소투표 신청을 할 때도 저에게 물어봤어야 한다는 걸 2011년 시설에서 나와 자립을 하고 나서야 알게 됐습니다. 신청을 할 때는 도장이 필요했는데, 제 도장은 요양원 원장님이 관리를 했습니다. 거소투표를 할 것인지 물어보지도 않고 신청했던 자체가 불법이었던 셈입니다.

민주화 이후 선거권 보장됐지만 #장애인 선거권은 아직도 사각지대 #시설에서 도장 관리하며 일괄 투표도

관련기사 5분이면 되는 투표, 내게는 5시간의 장벽
관련기사  침대 옆까지 '투표용지' 가져다주라는 미국

요양원에서 투표를 한다 하더라도 이동이 자유로웠다면 분명 제 한 표를 행사했을 겁니다. 투표용지를 시설 직원들이 제 침대까지 가지고 와야 했지만 그런 기억은 없습니다. 한 번은 도움을 받아 휠체어로 투표하는 곳까지 간 적이 있습니다. 그때 광경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원장님과 요양원을 관리하는 총무님 앞에 투표용지가 쫙 펼쳐져 있었습니다. '누구한테 찍을 것인가'를 묻고는 도장을 들고 일제히 기표하더군요. 내가 원하는 사람에게 표를 주었는지 확인할 수도 없었습니다. 


시설을 나와 2012년 대통령선거 때 처음 내 손으로 투표를 했습니다. 직접투표는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허둥댔습니다. 전동휠체어를 입으로 운전해서 투표소까지 갔습니다. 투표소에서도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통령 후보에 대한 정보도 별로 없었고요. 저는 지금 시설을 나와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할 수 있지만 지금도 시설에 계신 분들은 투표권을 박탈당하고 있을지 모를 일입니다.

이정훈 장애인차별철폐연대 정책실장은 "시각장애인 단체에서 선거를 하면 시각장애인 입장에서 투표용지 칸을 넓게 만든다"며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투표용지와 도구, 기표소를 제작할 때에도 일반인이 아니라 장애인의 입장에서 배려해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이정훈 장애인차별철폐연대 정책실장은 "시각장애인 단체에서 선거를 하면 시각장애인 입장에서 투표용지 칸을 넓게 만든다"며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투표용지와 도구, 기표소를 제작할 때에도 일반인이 아니라 장애인의 입장에서 배려해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장애인도 국민입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든 한표를 정당하게 행사할 권리가 있지 않나요? 장애인들은 투표를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도와주지 않아서 못하는' 것입니다. 투표할 수 있도록 나라가 돕는다면 투표할 수 있습니다. 제발, 이번 선거에서는 장애인의 선거권이 비장애인처럼 보장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보건복지부와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전국 장애인 유권자수는 264만6064명(2014년 지방선거 기준)으로 전체 유권자 수(약 4200만명)의 6.3%에 달합니다. 선거 참여율은 74.8%였지만 도움을 받지 못해 투표권을 행사하지 못했거나 자신의 의지와 상관 없이 투표한 장애인 유권자가 얼마나 될지는 알 수 없습니다.


투표 하지 않은 장애인들은 '몸이 불편해서'(43.9%)를 가장 큰 이유로 들었습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2014년 '장애인  실태조사' 보고서에서 "투표는 국민의 주권을 행사하는 일로 몸이 불편하기 때문에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투표에 참여하지 못하는 점에 대해서는 대책을 고민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위 사례는 익명을 요청한 제보자의 이야기를 기반으로 1인칭 시점에서 재구성했습니다.) 시민마이크 특별취재팀 peoplemic@peoplemic.com

◇특별취재팀=이동현 팀장·김현예·이유정 기자· 조민아 멀티미디어 제작·정유정(고려대 미디어학부 3학년) 인턴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