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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포럼] '민족'을 왜 오염시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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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박보균
박보균 기자 중앙일보

지난주 한총련의 미군 훈련장 기습 시위가 있던 다음날. 워싱턴 북쪽 메릴랜드에 사는 한국전 참전 노병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제프 매클린(75). "사격 훈련장은 가상 전쟁터다. 그런 곳에서 시위가 벌어진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한국전 때 미군 7사단에서 8개월간 통신병으로 근무했던 그는 열렬한 한국 팬이다. 지난 7월 27일 워싱턴의 한국전 참전 기념비 옆에서 열린 종전 50주년 기념행사에 그는 지역 대표로 참석했다. 젊은 시절 사선을 넘나들던 체험 때문인가. 그는 한국의 발전을 자신의 기억과 연관지어 뿌듯하게 여긴다. 그러나 이날 그는 충격을 받은 듯 여러 의문을 제기했다.

"한국 정부는 주한미군을 나가지 말라며 붙들려 한다. 그런데 극단적인 형태로 반미시위를 해온 학생 단체에 대한 한국 정부의 자세는 모호하다. 노무현 정부가 미국에 대해 2중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 아니냐."

그의 문제 제기는 한국을 주시하는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갖고 있는 일반적 의심의 하나다. 이들은 한국 사회 일각에서 넘쳐나는 민족 정서에 관심을 표명하곤 이런 질문을 빠뜨리지 않는다. "민족의 관점에서 북핵 문제에 접근할 수 있다. 그런데 같은 민족이라면서 북한 주민들의 배고픔과 정치적 박해엔 그렇게 무관심한지 미스터리다."

민족이란 말은 고귀하다. 명분과 감성이 앞서는 한국 풍토에서 민족이란 단어의 파괴력과 영향력은 엄청나다. 우리 사회의 친북 좌파들은 이 말을 선점해 한국 사회를 흔들어놓았다. 그들은 일반 국민의 순수한 민족 감정을 탈취했다. 그리고 반미.친(親)김정일 노선에다 민족정서를 교묘히 집어넣어 그들의 의도를 숨겼다. 그 바람에 민족이란 말이 병들었다. 폐쇄.배타성.과대망상으로 오염돼 버렸다. 북한 주민들의 비참한 삶은 모른 척하고 김정일 정권의 핵 협박은 옹호하는 이중성이 스며들었다.

그로 인한 후유증은 심각하다. 반미.민족은 한.미동맹을 헝클어 놓았다. 북한 핵무기를 제거하려는 미국의 압박 전술에 한국 정부는 소극적이다. 때문에 미국은 '같은 민족끼리 잘해봐라'는 식으로 한국 정부를 불신한다.

20년 전 5공의 전두환 정권 때다. 당시 한국 정부는 일본에 1백억달러 경제원조를 요청했다. 그때 우리 측이 내세운 논리는 일본의 동북아 안보 무임 승차론이다. 일본이 한.미 군사동맹의 덕을 보고 있는 만큼 돈을 빌려달라는 것이었다. 한.일간 줄다리기가 시작되었고 미국은 우리의 손을 들어주었다. 일본을 견제하는 데 한.미가 일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군사대국으로 나가는 일본을 막기 힘들게 돼 버렸다. 일본 견제용으로서 미국의 존재는 사라졌다. 북한 핵 문제는 일본엔 기회다. 한국의 경제력과 군사력만으로 일본을 말리기는 불가능하다. 더구나 미국은 한국을 제쳐놓고 일본을 확실한 우방으로 밀어주고 있다.

극일(克日)의 수단과 힘도 갖추지 못했으면서도 큰소리쳐 온 한국 사회 일각의 민족자주노선. 그 분위기에 젖은 盧정권의 외교. 그 외교의 수준과 스케일은 그들이 경멸하는 전두환 정권보다 떨어진다.

북핵 문제를 다룰 베이징 6자회담이 열린다. 한반도의 장래가 주변 4강의 손에 의해 결정될 상황이다. 어설픈 민족구호에 젖어 북핵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못한 탓에 우리의 처지가 이 모양이 되었다. 지금 우리의 외교역량으로선 6자회담은 벅차다.

민족이란 단어를 새로 다듬어야 한다. 폐쇄와 2중성, 낡은 이념으로 굴절된 부분을 바로잡아야 한다. 열린 민족주의, 순수한 열정, 이웃과 어울리는 민족주의로 재정비해야 한다. 그것이 8.15를 앞둔 우리 사회의 건강한 주류세력들에게 주어진 임무다.

박보균 논설위원 (워싱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