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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추고 싶은 수첩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524호 34면

수첩을 잃어버렸다. 울산하늘공원에서 생긴 일이다. 아버지는 화장한 다음 유골을 산하에 뿌리라는 유언을 남겼지만 우리는 그 뜻을 따르지 않았다. 그리울 때 찾아가 울 장소가 필요할 것 같았다. 아버지 유골을 추모의 집에 봉안하기로 했다. 고인의 이름과 태어난 날, 돌아가신 날을 봉안함에 새겨준다며 시설공단 직원은 아버지의 생년월일을 물었다. 아버지 생일이 생각나지 않았다.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는데. 마치 머릿속이 하얗게 가루가 된 것 같았다. 그때 수첩 생각이 났다. 나는 조부모 제삿날과 가족의 생일을 모두 수첩에 정리해 두었고 수첩은 항상 내 양복 안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김상득의 행복어사전

잠깐만요. 수첩에 있어요. 나는 상복 안 주머니를 뒤졌다. 없다. 주머니에 들어있던 것들을 모두 꺼냈다. 사망진단서와 화장시설 사용허가증과 돈을 넣어둔 봉투 등은 모두 그대로 있었지만 수첩은 없었다. 몇 번이나 뒤졌지만 찾지 못했다.

아까 2층에서 돈 봉투를 꺼내다가 흘린 것은 아닐까. 나는 2층 대기실로 뛰어가서 내가 있었던 자리 부근을 살핀다. 사람들이 내 주위로 모여든다. 장례 지도사가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수첩을 잃어버렸어요. 중요한 게 들었나요, 돈이나 카드 같은? 네. 중요한 게 들어있어요. 돈이나 카드는 없지만요. 어떻게 생겼어요? 그냥 수첩처럼 생겼어요. 재질이나 크기나 색깔 같은 게 있을 거 아닙니까? 스마트폰만한 크기에 파란색 종이로 된 수첩이에요. 요즘도 수첩 쓰는 사람이 있구나.

모르시는 말씀. 얼마 전까지 우리나라 정부는 수첩 정부였는데. 대통령도 ‘수첩공주’라고 불릴 정도로 수첩에 꼼꼼하게 메모했고 장관도 수석들도 수첩에 뭔가를 빼곡하게 받아 적었는데. 결국 수첩에 적힌 그 글자들이 자신들을 파면 시키고 구속 시켰지만.

밀로라도 파비치의 소설 『하자르 사전』에는 수첩공주는 아니지만 글자 때문에 죽은 공주 이야기가 나온다. 아테 공주는 항상 잠자리에 들기 전 양쪽 눈꺼풀 위에 하나씩 글자를 써두었다. 장님이 쓴 그 글자들은 적으로부터 공주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누구든 그 글자를 읽으면 즉사했다. 하루는 공주의 시종들이 공주를 기쁘게 하려고 거울 두 개를 선물했다. 빠른 거울과 느린 거울. 빠른 거울에는 미래가 비쳤고 느린 거울에는 과거가 보였다. 어느 이른 봄날 아침 공주는 잠에서 깨어 두 개의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았고 순식간, 그러니까 눈 깜짝할 사이에 죽었다. 눈을 감았다 뜨는 순간 자신의 눈꺼풀 위에 적힌 두 글자가 거울에 비쳤기 때문이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써둔 글자가 과거와 미래에서 동시에 날아와 공주를 해친 것이다.

나는 그날 내 동선을 되짚어 따라가며 찾아보았지만 어디에서도 수첩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윤기 선생은 잃어버린 물건을 찾을 때 이미 한번 찾았던 곳에 그 물건이 있는 것이라면 낭패라고 했다. 나는 지나쳐 온 곳들을 다시 샅샅이 살펴보았지만 역시 찾지 못했다. 이제 2층 대기실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수첩을 찾는다. 장례 지도사, 운구차량 기사, 친척들, 심지어 다른 집 상주와 유족들까지 나서서 내 수첩을 찾느라 분주하다.

아내가 내게 물었다. 대체 수첩에 뭐가 적혀 있는데? 아버지 생신. 봉안함에 아버지 생일을 적어야 하는데 기억이 안 나. 음력 8월 23일이잖아. 맞다. 이제 됐습니다. 수첩을 찾았나요? 아뇨, 아버님 생일을 알았으니 됐습니다. 수첩에 중요한 게 있다면서요. 그래도 어쩌겠어요. 이미 잃어버린걸요.

끝내 수첩은 찾지 못했다. 잃어버리지 않은 물건을 찾을 수는 없으니까. 탈상제를 치르고 상복을 반납하고 원래 내 옷으로 갈아입을 때 나는 내 재킷 안 주머니에 들어있는 수첩을 발견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상복 안 주머니에는 수첩이 들어있지 않았던 것이다. 장례식장을 떠나기 전 장례 지도사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장례 지도사는 내게 위로와 격려의 말을 한 다음 수첩 이야기를 했다. 어떻게 해요? 수첩을 잃어버려서…. 혹시 나중에라도 찾게 되면 연락을 드릴 게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 안주머니에 들어있는 수첩에 대해서도.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정말 중요한 걸 잃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

김상득 : 결혼정보회사 듀오의 기획부에 근무하며, 일상의 소소한 웃음과 느낌이 있는 글을 쓰고 싶어한다.『아내를 탐하다』『슈슈』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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