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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민섭의 변방에서

아무도 사과하지 않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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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민섭 사회문화평론가

김민섭 사회문화평론가

이번 주 박근혜 전 대통령은 수사를 받기 위해 검찰청 앞에 서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국민 여러분께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성실하게 조사에 임하겠습니다.” 사실 그는 여러 차례 국민을 향해 사과해 왔다.

‘최순실 게이트’ 때도 그랬다. “놀라고 마음 아프게 해 드린 점에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하고 담화문을 읽었다. 그런데 나를 비롯해 그것을 ‘사과’로 받아들인 이들은 많지 않았다.

‘송구함’이 사과의 수사가 맞느냐 하는 문제는 제쳐두고서라도 나는 그의 사과에서 반복되는 “-스럽게 생각합니다”라는 표현을 지적하고 싶다. 우선 ‘-스럽다’라는 접미사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하는 모호함을 만들어낸다. 잘못을 인정하는 태도라 할 수 없다.

‘-하게 생각합니다’하는 사족 역시 그렇다. 사태의 옳고 그름이나 사과의 진정성을 판단하는 것은 온전히 피해자의 몫이다. 그런데 가해자가 스스로 그 자리에 서려 하는 것이다.

여러 정치인이 이러한 방식으로 사과해 왔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2008년 5월 쇠고기 파문에 대해 “의견을 수렴하는 노력이 부족했다”며 “국민 여러분께 송구스럽게 생각한다”고 밝힌 이후 재임 내내 여러 차례 그 표현을 반복했다. 2017년의 유력한 대선후보들도 다르지 않다. 좌우와 세대를 가리지 않고 하나의 공식처럼 ‘-스럽게 생각한다’는 표현을 즐겨 사용한다.

‘사과의 시대’를 살아간다. 비리를 저지른 정치인과 재벌 총수가 대중매체를 통해 사과 담화를 발표하고, 음주운전을 한 연예인이나 성범죄 혐의를 받는 문인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사과문을 올린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미안과 죄송의 수사를 듣기란 좀처럼 힘든 일이다.

버티고 버티다가 내어놓는, 자기 보호와 변명으로 일관된 사과는 듣는 이들을 오히려 분노케 한다. 그리고 평범한 우리도 별반 다르지 않다. 연인, 가족, 오래된 친구에게 “그건 미안하게 생각해, 그런데…”하는 사과 아닌 사과를 마지못해 하곤 한다.

사과하는 데는 자존심이나 격식이 필요하지 않다. 미안해, 죄송합니다, 사죄드립니다, 하는 직관과 직설의 언어가 가장 상처받은 마음을 위로해 준다. 진심을 담는다면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와 같은 표현은 감히 나올 수 없다. 19대 대통령에게서는 “국민 여러분께 죄송합니다”하는 사과의 언어를 듣고 싶다. 물론 그가 사과할 일이 없는 무탈한 대한민국이 되기를 더욱 바란다.

김민섭 사회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