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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마스터'처럼 피해자에게 돈 돌려준 검찰…해외 범죄자금 환수 첫 사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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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네트워크의 회장 진현필(배우 이병헌)은 금융시스템을 만들어 대박을 노리는 소시민들에게 투자금을 모은다. 규모는 수조원대다. 그는 투자자들 앞에서 저축은행 인수 계획을 발표하며 ‘믿음’을 요구한다. “세상의 오해를 이해로 바꾸는 것이 내 책임”이라며 눈물까지 그렁인다.

그런 그를 뒤쫓는 정의로운 경찰이 있다. 서울지방경찰청 지능범죄수사팀장 김재명(배우 강동원)이다. 진 회장을 도운 국회의원들까지 노리며 ‘로비 장부’를 손에 넣으려 한다.


선은 악을 이긴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은 뻔하지 않다. 김 팀장은 진 회장의 비밀 계좌에 숨겨진 돈을 국고로 환수하지 않는다. 수십만명의 피해자들에게 직접 ‘계좌이체’로 돌려준다. “이건 불법인데…”라는 말과 함께. 영화 ‘마스터’(2016)의 내용이다.


영화같은 결말이 실제 벌어졌다. 대검찰청 국제협력단(권순철 단장)은 24일 “미국 정부와 공조를 통해 2007년 미국에 유출된 금융다단계 사기 범죄수익 약 9억8000만원을 환수해 691명의 피해자들에게 돌려줬다”고 밝혔다.

권 단장은 “해외에 유출된 뇌물이나 정치자금을 국고로 환수한 사례는 과거에도 있었다. 하지만 해외에 숨겨진 재산 범죄 피해금을 국내로 환수해 피해자들에게 돌려준 것은 처음이다”고 말했다.


사건은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곽모(48·수감 중)씨는 2007년 7월부터 이듬해 12월까지 서울 구로동에 사무실을 차려 놓고 “외환거래에 투자하면 원금 보장은 물론 36일 만에 투자금의 20%를 배당금으로 주겠다”며 투자자를 모았다. “다른 투자자를 끌어오면 투자금의 5%를 추천 수당으로 얹어 준다”고도 했다. 금융 다단계 수법이었다.

곽씨는 부동산 투자 사기까지 더해 총 2580억원을 챙겼다. 투자자들에겐 “회사가 곧 상장되면 주가가 주당 최하 20만원 이상이 돼 수익이 더 커질 것”이라며 안심을 시키기도 했다.


조사 결과 곽씨는 총 11건의 사기 행각을 벌인 것으로 드러났다. 곽씨는 사기 및 유사수신행위규제법 위반 등의 혐의로 2010년 10월 대법원에서 징역 8년이 확정됐다. 또 2007년 11월 19억 6000만원을 자금 세탁해 부인 명의로 미국 캘리포니아에 빌라를 산 것이 추가로 드러나면서 징역 1년이 추가됐다.

곽 씨의 유죄가 확정된 2010년 10월 대검 국제협력단은 미 국토안보수사국(HSI)에 ‘부동산을 몰수하고 범죄수익을 환수해 달라’고 요청했다. 해당 주택은 공매가 진행돼 2013년 5월 96만5000달러(약 11억 원)에 매각됐다.

이후 검찰은 미 법무부 등과 매각금 국내 환수 절차에 들어갔다. 하지만 진행은 더뎠다. 국내법에 근거가 없는데다 당시 이와 관련한 법 개정이 진행 중이어서 그 결과를 기다렸다. 법 개정은 원하는 방향으로 이뤄지지 않았고 국제협력단은 결국 2015년 11월 미 연방검찰에 미국법상의 ‘몰수 면제 및 피해자환부’ 제도에 따라 반환을 요청한다고 공식 제안했다.


미국에선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해 일정한 요건이 충족되면 범죄재산의 정부 몰수를 면제하고 범죄 피해자에게 돈을 돌려준다. 피의자를 상대로 피해자가 직접 손해배상에 대한 민사소송을 제기하고 손해를 입증해야 배상을 받을 수 있는 우리나라 법 제도보다 피해자 친화적이다.

미 법무부는 지난해 9월 몰수금 반환 결정을 내렸다. 국제협력단은 ‘미국유출 범죄피해금 환부지원팀’을 꾸렸다. 검사·수사관 15명은 곽씨의 판결문에 적힌 피해자 1800명의 인적사항을 확인해 일일이 우편으로 통지를 하고 신청서를 받았다.

2개월 동안 2000여건의 전화와 방문 상담이 몰렸다. 사건이 발생한지 10년이 흘러 피해자 중엔 사망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같은 경우엔 상속자까지 찾아냈다. 최종적으로 피해자 691명, 139억원의 피해금액을 특정했다.

돌려줄 수 있는 돈보다 피해금액이 훨씬 컸다. 국제협력단은 피해금액에 비례해 배분액을 정했다. 피해액이 약 1000만원일 경우 70만원 정도를 받는 수준이었다.

권 단장은 “역설적이게도 해외로 빼돌려진 재산이었기에 환수가 가능했다. 우리나라에 남은 사기 편취액은 법적 근거가 없어 피해자에게 직접 환수를 해줄 수 없다”며 “궁극적으로 미국처럼 피해자 보호를 위한 법률 제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 “이런 제도가 생기면 수사 초기 사기 피의자가 재산을 빼돌릴 수 있는 퇴로도 막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윤호진 기자 yoongo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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