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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을 대만이라 부르지 못하고…“싸우지도 못하고 중국에 항복했다”

중앙일보

입력

대만에서 ‘대만’ 국호를 둘러싼 논란이 다시금 불붙고 있다. 고위 관료들이 잇따라 대만 명칭 포기를 시사하는 발언을 내놓으면서 각계에서는 중국에 굴욕적인 항복을 했다며 반발하고 나섰다. 대만은 그동안 중국의 ‘국호 검열’때문에 대외적으로 ‘중화 타이베이(Chinese Taipei)’라는 명칭을 썼지만, 국호를 되찾으려는 노력은 지속해 왔었다.

다국적 걸그룹 '트와이스'의 멤버 쯔위는 2015년 한 방송에서 모국 대만의 국기인 청천백일만지홍기를 흔들었다가 중국인들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았다. 압박이 거세지면서 쯔위는 이후 중국인에게 사과하는 영상을 유튜브에 올렸다. [MBC 캡처]

다국적 걸그룹 '트와이스'의 멤버 쯔위는 2015년 한 방송에서 모국 대만의 국기인 청천백일만지홍기를 흔들었다가 중국인들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았다. 압박이 거세지면서 쯔위는 이후 중국인에게 사과하는 영상을 유튜브에 올렸다. [MBC 캡처]

대만 영자지 타이베이타임스는 21일 사설을 통해 “차이잉원(蔡英文) 정부의 관료들이 대만 국호 사용을 부끄러워하고 있다”며 “이는 대만을 외교적으로 무장해제 시키는 것으로 많은 국민이 정부를 믿을 수 없는 처지가 됐다”고 비판했다. 이어 “정부가 싸움조차 안 하고 중국의 ‘지시’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며 “국제 사회와 대만 국민은 중국에 무기력하게 항복한 정권에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라고 강도 높게 힐난했다.

대만은 ‘92공식’(九二共識ㆍ1992년 중국과 대만이 ‘하나의 중국’을 인정하자고 한 합의)에 따라 중국이 원하는 명칭인 중화 타이베이를 대외 명칭으로 사용하고 있다. 대만은 과거 대만 또는 중화민국이라는 명칭을 국호로 쓰려고 시도했지만, 중국이 국제사회에 압력을 넣어 모두 금지했다. 이 때문에 대만인들은 국호를 되찾는 일을 국가 존엄성과 직결된 문제로 여긴다. 천수이볜(陳水扁) 전 총통은 ‘대만’ 국호로 유엔에 가입하려다 실패하기도 했다.

최근 재점화된 국호 논란은 지난 17일 린더푸(林德福) 신임 체육서장이 입법원(의회)에서 “국제 스포츠대회에 대만이라는 명칭을 쓸 수 없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발언한 이후 촉발됐다. “이는 부득이한 선택”이라고도 덧붙였다. 또 최근 천슈중(陳時中) 위생복리부장이 오는 5월 세계보건기구(WHO) 총회에 참석할 때 대만 명칭을 사용할 것인지를 묻는 질문에 답을 회피한 것도 논란을 가중시켰다.

당초 대만인들은 지난해 반중국 성향인 차이잉원 총통이 취임하면서 새 정부의 독립 의지가 강화될 것을 기대했었다. 실제로 차이잉원 총통은 취임 후 첫 외교 정상회담에서 자국을 대만이라고 표현하고, 중국 편향의 ‘고등학교 학습 지도 요령’을 폐지하는 등 탈중국 행보를 이어갔다. 그러나 중국이 대만의 국제 행사 참석을 잇따라 무산시키고 자국 거주 대만인 중 ‘하나의 중국’을 인정하는 사람들에게만 거주 혜택을 선별 지원하는 등 압박의 수위를 대폭 높였다. 심지어 중국인의 대만 관광을 ‘비공식적으로’ 금지시키면서 지난해 대만을 찾은 중국인들은 전년대비 30%가량이나 급감했다.

이로 인한 반중정서가 높아진 상황에서 고위 관료들이 굴복하는 모습을 보이자 대만인들은 “정부가 치욕을 바로 잡지 않고 중국이 원하는대로 조용히 받아들이고 있다”며 시위에 나섰다. 대만 일간 자유시보(自由時報)에 따르면 23일 시민들은 체육서 청사 앞에 모여 린더푸 서장의 앞선 발언에 항의했다. 이들은 “린 서장은 대만을 스스로 작아지게 만들었다”며 “오는 2020년 도쿄올림픽에서 대만 명칭을 쓸 것”을 요구했다. 범야권 정당인 대만단결연맹(대련당) 소속 의원들도 “앞으로 닥칠 모든 곤란에도 다 ‘부득이한 선택’을 할 것인가”라며 정식 국호를 되찾을 것을 촉구했다.
김준영 기자 kim.jun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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