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트럼프 금융규제 완화 … 글로벌 금융 불안 불씨 되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08면

한국은행 리포트

지난달 3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취임 후 8번째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재무부에 올해 6월 초까지 현행 금융규제 법령 등을 완화하는 방향으로 개편 방안을 마련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이 명령에 2010년 제정된 ‘도드-프랭크법’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다.

6월 초까지 개편안 마련 지시 #유럽·일본도 완화 나설 가능성 #금융 대외 개방도 높은 한국 #투자 자금 흐름에 신경써야

그러나 대형 금융회사에 대한 규제 강화가 주된 목적인 이 법이 주요 개편 대상임은 대선 과정에서부터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강화된 금융규제가 민간에 대한 신용공급을 위축시키고 투자·고용 등 경제 성장에 부담이 된다는 이유에서다. 은행을 비롯한 금융업계는 이 같은 움직임을 환영하고 있다. 그동안 미국 은행들은 규제 비용 증가로 인해 신규 대출은 물론 취약계층에 대한 대출을 축소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해 왔다.

미국의 금융규제 완화 논의가 결론에 도달하기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릴 듯하다. 현재 공화당이 상하 양원을 장악하고 있지만 상원 의석수가 법안 통과에 필요한 정족수에 미달한다. 지난달 말부터는 도드-프랭크법 개편이 세제 개편, 건강보험 개혁, 인프라 투자 등 여타 정책과제에 밀릴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일각에선 일반 금융회사보다 강한 규제가 적용되는 ‘시스템적으로 중요한 금융회사(SIFI)’의 선정 기준을 완화하는 선에서 타협이 이뤄질 가능성을 언급하기도 한다.

자료 : SNL·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각 기관

자료 : SNL·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각 기관

현시점에서 미국의 금융규제 완화 논의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예상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미국의 금융규제 완화 움직임이 전 세계 및 국내 금융안정 측면에서 어떠한 시사점을 제시하는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글로벌 금융규제 개혁의 마무리 작업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다. 현재 바젤은행감독위원회(BCBS)의 28개 회원국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약 8년간 지속해 온 국제은행감독기준 개편(바젤Ⅲ) 작업을 마무리하는 협상을 진행 중이다. 주요 20개국(G20) 정상이 지난해 9월 정상회의 선언문을 통해 “은행산업에 대한 규제자본 부담이 크게 증가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잔여 규제에 대한 합의를 도출해 줄 것”을 주문한 데 따른 것이다. 트럼프 정부의 규제 완화 움직임은 금융규제 개혁의 마무리 협상을 지체시키고 규제의 불확실성을 높이는 요인이 될 수 있다.

둘째 주요국에서 규제 완화 움직임이 발생할 가능성이다. 미국을 따라 유럽, 일본 등 경쟁 국가도 규제 수준의 완화에 나설 수 있기 때문이다. G20 체제에서 추진된 금융규제 개혁은 기존의 규제가 은행 등 금융회사의 위험추구 영업행위를 억제하는 데 충분치 못했다는 반성에서 출발했다. G20 정상들의 합의에 따라 금융안정위원회(FSB)와 BCBS는 은행에 대한 자본규제비율을 올리고 시스템적 중요 은행으로 지정된 대형 은행에 대한 자본규제를 더욱 강화했다. 문제는 자본규제가 강화될수록 금융시스템의 안정성은 높아지지만 은행의 영업비용도 증가한다는 것이다.

자본규제 강화는 가계, 기업 등에 대한 대출비용의 증가로 이어진다. 위기에 따른 막대한 사회적·경제적 비용을 경험한 금융위기 직후에만 해도 규제 비용의 증가는 감내해야 할 부분이라는 데 국제적 공감대가 형성됐다. 그러나 일부 국가가 국제 합의에서 벗어난 규제 정책을 사용하면 자국 금융회사의 상대적 경쟁력 저하를 우려한 다른 국가도 규제 비용 낮추기에 나설 수 있다.

자료 : SNL·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각 기관

자료 : SNL·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각 기관

셋째 규제 차익 행위가 발생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경쟁우위 확보를 위한 각국의 규제 완화 경쟁이 발생할 경우 또 다른 형태의 부정적 결과가 초래될 수 있다. 국가별로 금융규제 수준에 차이가 생기면 규제 수준이 낮은 지역이나 국가로 고위험 투자행위가 집중되는 규제 차익 추구 현상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이런 현상이 적절히 제어되지 않고 임계점에 이르면 금융 불안의 단초가 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금융업의 근원적 위험성에 대해 여전히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은행 등 전통적 금융업의 가장 중요한 역할인 실물경제에 대한 신용공급은 다수의 예금자로부터 단기 자금(부채)을 받아 장기 자금(자산)으로 대출함으로써 이뤄진다. 금융업을 다른 산업과 구별되게 하는 자산·부채 만기변환 영업모델의 지속가능성은 예금자(채권자)의 신뢰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어떤 이유로든 은행 또는 금융시스템에 대한 신뢰가 무너질 경우 다수의 예금자가 예금인출을 일시에 요구하는 것만으로도 은행은 도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금융은 신뢰의 상실에서 오는 실패의 위험을 내재하고 있고, 그 실패에 따른 사회·경제적 피해가 크다는 점에서 어떤 산업보다도 적절한 규제가 요구되는 부문이다. 최근 미국에서 시작된 금융규제 완화 논쟁이 금융업계의 로비, 각국의 규제 수준 낮추기 경쟁 등과 맞물리면서 새로운 금융위기의 씨앗이 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하는 이유이다.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우고 선거에서 승리한 트럼프 정부 입장에서 경제 활성화의 방편으로 규제 비용을 낮추려는 시도는 이해할 만하다. 또한 과도한 규제는 금융산업의 발전과 효율성을 저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합리적인 규제 수준을 찾으려는 노력을 부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다. 미국의 규제 완화 추진이 그동안의 금융개혁 성과를 크게 훼손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김주현한국은행금융안정국 금융규제팀장

김주현한국은행금융안정국 금융규제팀장

그러나 금융위기의 기억이 희미해지는 상황에서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미국의 금융규제 완화 움직임이 글로벌 금융개혁의 논의성과 등에 미칠 영향을 면밀히 모니터링 할 필요가 있다.

김주현 한국은행 금융안정국 금융규제팀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