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漢字, 세상을 말하다] 暗香<암향>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523호 29면

‘갓득 냉담한대 암향은 므사일고’


 정철 사미인곡의 한 구절이다. 우리 선비는 화려하게 드러나는 것을 경멸하고 은은하게 스며 나오는 것을 으뜸으로 쳤다. 암향은 ‘어두운 향기’가 아니다. 한켠으로 비켜 있는, 자신을 보여주려고 안달하지 않는, 숨어 있는 향기다.

 중국 시인들도 암향을 최고로 평가했다.

 ‘담장 모퉁이 매화 몇 송이/ 추위를 타고 와 혼자 피었다/ 멀리서도 눈이 아님을 알겠구나/ 암향이 코끝에 있으니(墻角數枝梅 凌寒獨自開 邀知不是雪 爲有暗香來)’


 송(宋)나라 시인 왕안석(王安石)의 시 매화(梅花)다. 매화와 암향은 거의 동의어처럼 쓰인다. 묵매(墨梅)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간 의미다. 암향에 묵까지 얹혔으니 암향의 최고 경지라고나 할까.


 원말명초(元末明初) 화가 왕면(王冕)은 묵매 한 점을 그려 놓고 이렇게 노래했다.

 ‘왕희지( 王羲之 - 진· 晉의 서예가)가 붓 씻던 연못가/ 가지마다 옅은 묵매가 피었다/ 그 색깔 칭찬할 이 필요 없네/ 그저 천지에 맑은 향기만 가득하구나(吾家洗硯池頭樹 朶朶花開淡墨痕不要人?好顔色 只留淸氣滿乾坤)’


 매화의 그 밝은 색깔조차 화사함으로 여겨 내치는, 그 깐깐함이 손에 잡힐 듯 그려진다. 암향의 상징 매화의 색까지 담담한 묵흔으로 지웠다. 겉치레에 대한 옛 시인들의 경계는 이처럼 치열했다.

 암향과 통하는 것이 석회(石灰)다. 석회처럼 희미한 색깔이 또 있을까. 수십 길 지하에서 온갖 ‘고초’를 겪었으니 시인들이 석회를 그냥 지나칠 리 없다.

‘천 번을 찍고 만 번을 쪼아야 산에서 나온다/ 불길로 태워도 한가롭기만 하구나/ 몸을 가루로, 뼈를 조각으로 만든 데도 태연자약/ 다만 세상에 청백으로 남으리라(千錘萬鑿出深山 烈火焚燒若等閑 粉身碎骨渾不? 要留淸白在人間)’


 명대 청백리 우겸(于謙)의 절창이다. 수만 도의 불길과 수억t의 무게를 견디고도 겸손한 표정을 잃지 않는 석회에서 시인은 황제에 폭정을 견디며 백성을 위해 꿋꿋이 버텨내는 청백리의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장미 대선이 코앞이다. 암향의 향과 석회의 자태를 지닌 인물이 누구일지, 곰곰 생각해야 할 시점이다.

진세근
서경대학교 문화콘텐츠학부 초빙교수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