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즈를 강판에 가는 소소한 순간, 행복은 거기에 있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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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3호 30면

상상만으로도 오싹하다. 정신없이 일하고 있는 데 아빠가 회사로 불쑥 찾아온다. 직장 동료들과의 대화에 느닷없이 끼어들어 ‘아재 개그’를 날리고, 중요한 거래처 사장과의 만남에 따라 나서서는 “우리 딸이 바쁘다고 하도 집에 안 와서 딸 역할을 할 사람을 고용했다”며 원망 섞인 농담을 건넨다. 16일 개봉한 독일 영화 ‘토니 에드만’은 한시라도 장난을 치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치는’ 아빠(페테르 시모니슈에크)와, 그런 아빠때문에 미칠 지경에 처한 딸 이네스(산드라 휠러)의 이야기다.

[영화 ‘토니 에드만’] #감독:마렌 아데 #배우:페테르 시모니슈에크 #산드라 휠러 #등급: 청소년 관람불가

함께 살던 반려견이 갑자기 죽자 외국에 혼자 있는 딸이 그리워진 걸까. 아빠는 기업 컨설턴트로 일하는 딸을 찾아 루마니아 부쿠레슈티에 온다. 예쁜 치즈 강판을 선물로 챙겨왔지만, 딸은 그저 곤란한 기색이다. 일에만 집중하기도 벅찬데, 심심한 아빠까지 챙길 여유가 없다. 꽉 짜여진 삶에 늙은 아빠는 그저 불청객일 뿐이다. 24시간 휴대전화를 붙들고 일만 하는 딸에게 아빠가 묻는다. “그래서 요즘엔 행복하니?” 딸이 잘라 말한다. “행복이라뇨, 행복은 거창한 말이에요.” “그럼 너는 인생에서 뭐가 제일 중요한데?” “왜 그런걸 물어요. 아빠도 딱히 답을 알고 있진 않잖아요!”

영화는 독특하다. 딸과 아버지의 팽팽한 긴강감을 그리면서도 과거에 이들 사이에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 굳이 설명하지 않는다. 어쩌면 특별한 사연같은 건 없었을 지 모른다. 그저 두 사람은 예전부터 잘 맞지 않았을 뿐. 똑똑하고 야망이 큰 딸은 택배 하나 받을 때도 상황을 설정해 장난을 쳐야 직성이 풀리는, 하지만 그 외에 어떤 계획도 없어보이는 아버지가 오래 전부터 한심했다. 그래서 한바탕 퍼부은 후 아빠를 내쫓듯 떠나보내지만, 이쯤에서 포기할 아버지가 아니다.

아빠는 얼마 후 우스꽝스런 가발에 틀니를 끼고 나타나 자신을 ‘인생 컨설턴트 토니 에드만’이라고 소개하며 본격 연기를 시작한다. 이제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그냥 자신이 어떻게 사는지를 그대로 보여주기로 한 이네스. 컨설팅이란 명목으로 의뢰 회사에게 직원들을 해고할 논리를 만들어주고, 사무실 동료와 몰래 연애를 하며, 파티에선 친구들과 마약을 한다. 토니 에드만은 그 모든 순간에 불쑥불쑥 나타나 참견하고, 사고를 치고, 결국 그녀를 끌고 남의 집 파티에 찾아가 다짜고짜 노래를 시킨다. 아마도 부녀가 오래 전 다정하게 함께 불렀을 노래. 휘트니 휴스턴의 ‘그레이티스트 러브 오브 올(Greatest love of all)’에는 아버지가 딸을 키우며 바라던 바가 담겨 있다.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 그것이 가장 위대한 사랑(Learning to yourself, It is the greatest love of all).”

코믹한 장면들이 많지만, 폭소가 터지는 정도는 아니다. 화해의 순간 역시 극적이지는 않다. 아버지의 영향인지 돌발적으로 나체 생일파티를 강행하는 이네스의 앞에 아빠가 불가리아의 털복숭이 도깨비인 ‘쿠케리’ 탈을 쓰고 나타난다. 한바탕 소동이 끝난 후 도망치는 아버지를 맨발로 따라나간 딸. 그리고 탈을 벗을 수도 없어 땀을 흘리며 고통스러워하는 아버지를 껴안으며 고마움을 전한다.

영화 중반, 회사에서 해고를 당하게 된 남자를 만난 자리에서 아버지는 “유머를 잃지 마시오”라고 말한다. 이네스는 직장을 잃은 사람에게 그게 가당키나 한 위로냐며 화를 내지만 토니는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그 인사는 바로 딸에게 건네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야 아버지는 딸에게 던졌던 질문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에 대한 답을 내놓는다. “인생은 빨리 지나가. 붙잡아둘 수는 없어.” 그러니 예쁜 강판에 치즈를 가는 그런 소소한 일상을 충분히 누리며 살아가라는 것. 영화는 끝까지 밍밍하지만, 그렇게 조미료를 뺀 것이 이 영화의 매력이다. 2016년 칸영화제에서 국제비평가협회상을 수상했다. ●

글 이영희 기자 misquick@joongang.co.kr
사진 그린나래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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