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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노갑 비자금 파문] 추가 뭉칫돈 흔적…규모 늘 수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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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은 12일 대검 11층 조사실에서 북어국으로 아침 식사를 한 뒤 2000년 봄 현대 비자금 수수 부분을 이틀째 집중 추궁받았다.

權씨는 총선 당시 1백10억원을 조성해 쓰긴 했지만 현대와는 무관하다며 완강히 혐의를 부인했다. 하지만 상황은 그에게 일단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검찰은 權씨에게 알선수재 혐의를 적용하는 데 별 문제가 없다고 본다. 그가 현대를 돕기 위한 실력 행사를 했음을 뒷받침할 관련자 진술 등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이날 소환한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으로부터 '權씨가 먼저 도와달라고 했다'는 진술도 받아냈다.

당시는 현대그룹이 자금난에 시달리던 때였다. 따라서 權씨가 현대에 대한 금융 지원 등에 대한 부탁과 함께 돈을 받았을 것이란 추측이 충분히 가능하다.

대검이 權씨를 긴급체포한 직후 이기호 전 청와대 경제수석을 불러 조사한 것도 당시 현대에 대한 정부의 지원에 權씨의 입김이 있었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權씨 측근은 "1백억원이나 되는 돈을 현금으로 준다는 게 말이 되느냐"면서 "1999년 왕자의 난이 터진 뒤 정몽헌 회장이 權씨 집으로 찾아와 만난 적은 있지만 이익치씨가 주장하는 호텔에서 만난 적은 없다"고 말했다.

어쨌거나 정몽헌 전 회장과의 회동은 인정한 셈이다. 현대 비자금이 아니었다는 전제로 당시 1백억원의 자금을 동원했다는 부분도 밝혔다.

대북송금 사건 특검 및 검찰 수사, 그리고 현대와 구 여권 관계자들의 얘기를 종합하면 2000년 4월 총선을 전후해 조성한 현대의 비자금은 4백억원이 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현대건설과 현대상선이 출처다. 양쪽 모두 1백억~2백억원대의 거액이다.

그리고 그 돈의 주요 도착지는 박지원 전 대통령 비서실장과 權씨로 나타나 있다. 또 다른 구 여권 실세들도 몇몇 거론되고 있다.

현대건설의 1백50억원 조성 경위와 흐름은 특검 수사에서 이미 드러났다. 정몽헌 전 현대아산 회장의 지시에 따라 양도성 예금증서(CD)로 박지원씨에게 전달했다는 것이다.

여기에 현대상선이 2백억원을 조성했다는 얘기가 12일 새로이 불거지면서 또 다른 수사 초점이 될 전망이다. 특검에서 수사를 맡았던 한 관계자는 12일 "이밖에도 비자금으로 의심되는 흔적들이 발견됐었다"고 말해 비자금 규모가 더 커질 가능성을 시사했다. 사건이 현 단계에서 매듭지어지지 않을 수 있음을 짐작케 하는 말이다.

수사 속도가 빨라지면서 정치권 인사들에 대한 줄소환도 임박한 것으로 보인다.

權씨 이외에 자금을 받은 의혹을 받고 있는 당시 실세들, 權씨 등으로부터 총선 자금을 배분받아 쓴 총선 출마자들, 그 배분 과정에 동원된 것으로 알려진 權씨의 측근 조직 등이다.

이 중 단순히 돈을 받아 쓴 후보들은 정치자금법의 공소시효(3년)가 이미 지나 대가성이 드러나지 않는 한 사법처리 대상에선 제외된다. 하지만 금융 관련 기관에 현대의 지원을 요구하는 등 압력을 행사했을 경우에는 알선수재의 공범이 될 수 있다.

강주안.이수기 기자

사진= 김상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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