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트렌드] 워킹맘 직원은 오전 출근 느긋하게, 직장인 고객은 점심·저녁 때 편하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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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권 유연근무제 확산
일본 3대 메가뱅크 중 하나로 자산 규모 1위인 미쓰비시도쿄UFJ은행이 지난해 재택근무제를 시행했다. 은행은 소비자의 신용정보를 다룬다는 측면에서 통상 재택근무제 도입이 어려운 곳으로 여겨졌지만 이 은행은 이런 선입견을 깼다. 일본 금융권에서 큰 영향력이 있는 이 은행의 재택근무 실험이 순조롭게 진행되면서 다른 은행들도 속속 동참할 것으로 보인다. 국내에서도 은행권 스마트근무제(유연근무제) 도입이 확산되고 있다. 출퇴근 시간을 자유롭게 조정하는 단순한 방식부터 재택근무까지 형태도 다양하다.

KB국민은행 지점 100여 곳

창구업무 오후 7시까지

다음 달 중 시행키로 확정

은행권에선 그동안 특유의 장시간 근로 관행을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한국노동연구원의 분석에 따르면 은행원의 주 5일 평균 실질근무시간(점심시간 등 제외)은 56시간으로 하루 11시간이 넘는다. 아이를 키우는 여성 직원이라면 사실상 감당하기 어려운 격무다.

저출산 극복이 전 국가적 과제로 부상했음에도 육아 부담과 고통은 줄어들지 않고, 여전히 육아 때문에 일을 그만두는 여성이 많은 실정이다. 이에 대해 기업의 참여나 협조가 미흡하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되면서 최근 금융권을 중심으로 근로 방식의 변화를 혁신 과제로 다루는 기업이 늘고 있다.

시차 출퇴근, 2교대 근무 큰 효과

KB국민은행은 지난해 12월 유연근무제 본격 도입을 앞두고 전국 45개 영업점을 대상으로 시범 운영을 시작했다. 시범 운영 모델은 ▶시차 출퇴근제 ▶2교대 근무제 ▶애프터 뱅크(After Bank) ▶아웃바운드 라운지 등 4개 모델이다. 도입이 가장 쉽고 단순한 건 시차출근제다. 45개 파일럿지점 직원들은 출근시간을 오전 9시·10시·11시 중 선택할 수 있다. 오전 9시 출근은 기존과 동일하고 오전 10시 출근하는 직원은 오후 7시까지, 오전 11시 출근은 오후 8시까지 근무하는 식이다.

제도 도입으로 이른 아침 장거리 출근이 어려운 직원들이 보다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게 됐다는 평가다. 서울 마포 인근의 한 지점에서 근무하는 구모 차장은 워킹맘이다. 아침에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야 하는데 출근시간 때문에 항상 고민이었다. 구 차장은 “유연근무제를 시작하면서 아침에 여유롭게 아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 주고 출근할 수 있게 돼 회사 일에 더욱 전념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같은 지점의 정모 대리는 퇴근 후 다니던 영어학원 시간을 오전으로 바꿨다. 일과 후에는 약속도 많고 야근하는 경우도 있어 학원을 빼먹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정 대리는 “오전 시간을 활용하게 돼 훨씬 여유가 생겼다”고 말했다.

직장인 김모씨는 지난 연말 급매로 나온 아파트를 구매해야 한다는 아내의 연락에 황급히 업무를 마치고 대출 상담을 하러 인근 은행을 찾았다. 그러나 이미 은행 영업시간이 마감된 뒤였다. 다음날 점심시간을 이용해 다시 은행을 찾았지만 객장에 사람이 너무 많아 상담을 받지 못하고 돌아왔다. 김씨는 “결국은 오후 근무시간을 쪼개 대출을 받았다”고 말했다.

어느 은행이든 점심시간에 사람이 몰린다. 직장인이 많은 도심 지역 지점이라면 더하다. 앞으로는 이런 불편도 덜해질 전망이다. 국민은행의 ‘2교대 근무제’는 일찍 출근하는 직원과 늦게 출근하는 직원이 고객이 몰리는 점심시간에 함께 근무하면서 대기 고객의 불편을 줄이는 개념이다. 일찍 출근하는 직원은 오후 4시에 창구 업무 마감 후 일찍 퇴근하고, 늦게 출근하는 직원들은 오후 7시까지 창구업무를 하고 퇴근하게 된다.

고객 몰리는 시간엔 전 직원 근무

최근 KB국민은행은 4월 중 국내 금융권 최초로 100여 개 지점에서 은행의 이용시간을 오후 7시까지 늘리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시중은행 중 일부 지점이 연장 영업을 한 적은 있지만 100개 이상 지점이 일제히 영업시간을 연장한 건 처음이다. 2교대 근무제와 애프터 뱅크를 더욱 확대하는 것이다.

애프터 뱅크는 영업점 환경을 고려해 영업시간을 두 가지(오전 10시~오후 5시, 낮 12시~오후 7시) 형태로 다양화하는 것이다. 국민은행 관계자는 “여러 점포가 묶여 있는 PG(Partnership Group)체계당 한 개 내외의 지점을 애프터 뱅크로 지정해 늦은 시간 은행 업무를 보려는 고객 수요를 흡수할 것”이라며 “이 제도가 정착되면 점심시간에 대기 고객이 집중되는 현상도 완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연근무제 확대는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도래와 맞물려 있다. 4차 산업혁명의 핵심 중 하나는 근로 환경의 디지털화다. 많은 기업이 대면업무 대신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없는 디지털 근로 감독과 지시로 방향을 틀고 있는 이유다. 세계경제포럼(WEF)은 4차 산업혁명이 진행됨에 따라 2020년까지 약 710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질 것으로 내다봤다.

이 일자리는 대부분 전통적인 근로환경에 기반을 둔 업종이다. 새로 생길 것으로 예측된 200만 개의 일자리는 반대로 근로시간이나 작업장에 구애받지 않는 형태다. 국민은행 관계자는 “유연한 근로 형태로 다양한 영업점 운영 모델을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장원석 기자 jang.wonse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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