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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 속내를 알 수 없는, 그래서 더 섬뜩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스타일리스트: 이광훈 헤어: 정아(에이바이봄) 메이크업: 재희(에이바이봄) 의상 협찬: H&M, 띠어리맨, 암위

스타일리스트: 이광훈 헤어: 정아(에이바이봄) 메이크업: 재희(에이바이봄) 의상 협찬: H&M, 띠어리맨, 암위

‘해빙’(3월 1일 개봉, 이수연 감독)은 모든 등장인물들에 대한 의심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심리 스릴러다. 이혼 후, 재개발이 한창인 경기도 북부 신도시의 병원으로 쫓기듯 옮겨 온 의사 승훈(조진웅). 

그의 눈에는 모든 인물이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것처럼 비친다. 그중 승훈을 가장 불안하게 하는 이가 바로, 김대명(36)이 연기하는 성근이다. 승훈이 세 들어 사는 집의 주인이자, 그 건물에서 정육 식당을 운영하는 성근은 알 수 없는 표정과 말투로 승훈을 계속 불편하게 한다. 성근이 진짜 어떤 인물인지는 맨 마지막 장면을 확인해야 알 수 있다. 아니, 그 뒤로도 수많은 가능성이 남는다. 

끝까지 그 속내를 정확히 알 수 없는, 그래서 계속 눈여겨보게 되는 사람. 그건 배우 김대명에게 들어맞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대표작 TV 드라마 ‘미생’(2014, tvN)의 사람 좋은 김동식 대리 말고도 그가 꺼내 보일 모습은 이렇게나 많으니까. 

따져 보면, 그의 연기는 늘 ‘속을 다 가늠할 수 없는’ 미스터리 같은 것을 품고 있었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관객이 계속 궁금해 하는 인물”, 그런 연기 말이다.


신기한 경험을 했다. 김대명을 인터뷰하고 돌아와 녹음 내용을 녹취하는데, 방금 만나고 온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이 녹음 파일 안에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차분한 표정을 한 그의 얼굴을 마주할 때와는 다르게, 목소리만 듣고 있자니 훨씬 의뭉스러운 느낌이다. 어떤 말은 농담인지 진담인지 잘 모르겠다. 높낮이가 별로 없는 얇은 목소리, 어미(語尾)를 간결하게 처리하는 말투가 그 뜻을 곱씹게 한다.

'해빙' 김대명 인터뷰

해빙

해빙

맞다. ‘해빙’의 관객이 성근의 한마디 한마디에 왠지 모를 스산함을 느끼는 데도 그 목소리와 말투가 큰 몫을 한다. 김대명의 목소리, 그 특유의 불가사의를 우리는 일찍이 만끽한 적 있다. 스릴러영화 ‘더 테러 라이브’(2013, 김병우 감독)에서 라디오 생방송 프로그램에 전화 걸어 “한강 다리를 폭파하겠다”고 위협하는 테러범의 목소리가 바로 그의 것이었다. “(얼굴은 나오지 않는데) 내 목소리만 따로 듣는 경험을 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내가 알던 것보다 목소리가 퍽 얇게 들리더라. 이 목소리로 어떤 효과를 낼 수 있겠다는 생각은 해 봤지만, 그렇다고 내 목소리를 활용해 연기해야겠다는 계산은 하고 싶지 않다. 그렇게 편한 수를 두며 연기하고 싶지 않다.”

기교를 부리는 것, 관객을 순간적으로 현혹하는 것에 그는 별로 관심이 없어 보인다. ‘해빙’의 성근을 연기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스릴러 장르 특유의 의혹과 반전에 충실한 인물로 성근을 그리려 했다면, 전형적인 악당처럼 더 세게 연기했을 거다.” 그는 오히려 그걸 피하고자 했다. “그보다는 훨씬 미묘한 선 안에서 움직이려 했다. 승훈을 뚜렷하게 괴롭히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긴장하게 하는 인물로 표현하고 싶었다. 그래야 관객이 성근을 향해 더 많은 가능성을 열어 둘 테니까.” 그 가능성이라는 건, “‘선악을 쉽게 가늠할 수 없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뜻한다. 그걸 제대로 그리려면 “관객이 끝까지 그 인물을 눈여겨보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일 것이다. ‘미생’의 우직한 김 대리든, 스릴러 풍자극 ‘특종:량첸살인기’(2015, 노덕 감독)의 살인범이든, 웹 드라마 ‘마음의 소리’(2016, 네이버TV·KBS2)의 철없는 ‘엉뚱남’이든, 김대명의 연기는 어딘가 모르게 차분한 느낌이 든다. 극이 정점에 다다른 장면에서도 연기가 뜨겁게 끓어오르는 법이 없다. 인물의 감정은 충실히 전달하면서도 그로부터 반 발짝 떨어져 그 인물을 바라보게 하는 태도, 거리 두기.

인터뷰하는 내내 김대명도 그랬다. 이야기의 주요 내용을 종이에 메모하며 말하는 태도가 차분했다. 배우로서 지닌 가장 큰 불안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그는 “‘그 작품과 인물에 대한 내 해석을, 관객이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하는 것”이라 답했다. “작품이 끝날 때마다 그 반응을 살피고 그것을 정리하고, 내가 이 영화를 통해 뭘 얻었고 뭘 비워야 하는지 결론을 내린다”고 말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을 “모든 걸 내려놓고 사는 편”이라 설명했다.

이 얘기를 듣고 그가 ‘느긋한 성격’이라 생각하면 오해일 듯하다. 오히려 그 반대로, 스스로에게 굉장히 엄격하다는 얘기로 들린다. “연기를 하지 않을 때는 가장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려 한다. 감정의 데시벨을 ‘0’에 맞춰 놓는다고 할까. 나 자신이 어떤 감정에 치우쳐 있으면, 캐릭터를 받아들이는 데 그 영향이 미칠 테니까.” 실제로, “촬영하는 동안은 사람 많은 자리에 가거나 하는, 예기치 못한 상황에 휘말릴 일을 만들지 않으려 노력”할 정도다. 물론 그건 지금 그의 삶에 “연기 말고 어떤 영향을 줄 만한 것이 없다”는 뜻이다. 또 그가 원래 소중한 것에 대해 깊이 고민하는 대신, 다른 것들에는 전혀 신경 쓰고 싶어하지 않는 성격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후진 연기를 내놓고 싶지는 않다”는 그의 마음일 테지만.

최근 몇 년은 그에게 격동의 시기였다. ‘더 테러 라이브’의 테러범 목소리와 스릴러 ‘방황하는 칼날’(2014, 이정호 감독)의 능청스러운 성매매 알선업자로 스크린에 개성 넘치는 인상을 새긴 그는, ‘미생’의 김 대리 역을 통해 대중적으로 얼굴을 알렸다. 그 후 판타지 멜로 ‘뷰티 인사이드’(2015, 백종열 감독), 스릴러 ‘특종:량첸살인기’, 범죄 드라마 ‘내부자들’(2015, 우민호 감독), 시대극 ‘덕혜옹주’(2016, 허진호 감독), 재난 블록버스터 ‘판도라’(2016, 박정우 감독) 등에서 역할의 비중을 키워 왔다. “예전에 오디션을 보고 배역을 따낼 때만 해도, 날 뽑아 준 사람과 그 책임을 나눌 수 있었다. 지금은 내 지난 연기를 토대로 캐스팅되는 거니까, 그에 대한 책임을 크게 느끼고 있다.”

어릴 적부터 “부모님 말씀 잘 듣고 ‘좋은 게 좋은 거다’ 하면서 살아왔던” 그가 정답도 없고 끝도 없는 연기를 하고 있다니. “지금껏 살면서 선택한 것들 중 가장 자유롭고 틀에서 벗어난 것이 바로 연기다. 카메라 앞에선 뭘 해도 되니까. 그래서 연기를 하는 것 같다.” 웬만해서는 자신에게 만족하거나 후한 평가를 내리려 하지 않는 그에게 겨우 얻어낸 이야기 한 토막. “죽을 때까지 내 연기에 만족할 수 없을 거다. 만족하고 나면 다음 연기는 어떻게 하겠나. 만족이 아니라 최근 보람됐던 순간을 꼽자면, 동명 웹툰을 각색한 ‘마음의 소리’를 본 사람들이 ‘오랜만에 마음껏 웃었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였다. 보는 사람들이 아무 생각 없이 깨끗하게 웃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출연한 작품이었다.” 앞으로 그가 연기의 보람을 느끼는 순간이 더욱 많아지기를, 그 순간들이 그 자신을 더욱 충만하고 행복하게 하기를.

장성란 기자 hairpin@joongang.co.kr 사진=라희찬(STUDIO 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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