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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성장·일자리·복지 세 마리 토끼 잡는 통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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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최병일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

최병일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발 신보호주의 바람이 세상을 흔들고, 중국의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경제 보복이 수위를 높여가고 있음에도 올해 대선 정국에서 통상 문제는 실종됐다.

수출 위주 통상정책은 한계 #해외 소비자·자본 유치 위한 #서비스 문호 적극 개방으로 #문화·관광·의료 허브 돼야

무역 의존도가 100%에 가깝고, 세계 8대 통상대국이며 통상입국 전략으로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대한민국의 차기 대선주자 누구도 통상 문제를 거론하지 않는 상황은 그들의 인식이 우물 안 개구리임을 보여준다. 국민소득 3만 달러(약 3400만원)의 고개를 넘지 못하고 저속 성장의 늪 속에 가라앉고 있는 상황에서 그나마 한국 경제를 지탱하고 있는 것은 무역인데 말이다.

김대중 정부가 시동을 건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부터 시작해 노무현·이명박·박근혜 정부에 이르기까지 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보다 많은 국가와 FTA 맺기는 진보 또는 보수라는 정권 성향과 무관하게 추진돼 왔다.

지금의 대선 정국에서 통상 담론의 실종은 FTA 피로증 탓이기도 하다. 적극적인 FTA 추진으로 50개 넘는 국가와 FTA를 맺었지만 많은 중소기업이 FTA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답답한 현실과 FTA 추진 과정에서 농민과 중소 상공인들이 희생당했다는 피해 의식이 겹쳐서 통상 문제가 차기 정부의 주요 국정과제로 부상하지 않고 있다면 우리는 스스로 미래를 만들어낼 기회를 차버리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통상정책을 리셋하면 기회가 생겨난다는 걸 인식할 필요가 있다. 대선 정국에서 청년 일자리 창출 묘책이라는 것이 고작 세금을 퍼부어 공공 분야 고용 창출이라는 지속 가능하지 않은 구태의연한 대책으로 나오는 이유는 수출 따로, 내수 따로라는 틀에 갇힌 발상 때문이다. 역동성과 활력을 급속히 상실하고 있는 지금, 더 많은 젊은이를 공무원 시험장으로 내몬다면 머리만 커지고 손발은 없는 기형적 경제체제를 잉태할 따름이다. 경제를 수출과 내수로 구분해 따로따로 노는 정책을 리셋해야만 한국 경제의 미래가 보인다. 10년 가까이 침체된 내수를 살리는 절체절명의 과제와 무역 역풍을 돌파해야 하는 시급한 과제를 연결시킬 때 한국의 미래는 기약될 수 있다. 그 출발점은 통상정책 리셋이다.

한국제 전자제품·반도체·철강·선박을 더 많이 해외에 수출하는 것을 목표로 운용돼 온 지금까지의 통상정책은 리셋돼야 한다. 역풍이 불 때마다 흔들리는 경제 체질을 튼튼하게 하려면 우리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또 다른 엔진을 장착해야 한다. 대한민국 5000만 인구로만 한정된 내수를 한국에서 비행시간 2시간 거리에 있는 지역으로 확대하는 것은 한국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선택이다. 일본과 중국을 한국의 경제 생활권으로 끌어들일 때 우리에겐 새로운 기회가 열릴 것이다. 그들의 지갑을 열 수 있는 매력적인 소비공간·생활공간·문화공간·의료공간으로 탈바꿈한다면 우리는 성장·일자리·복지의 세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다. 문화·연예·관광·의료를 연결하는 클러스터를 만들어내는 서비스 빅뱅이 바로 그것이다.

한국의 서비스 산업을 옥죄고 있는 칸막이식 규제로는 어림도 없다. 영세 자영업자들의 생존권을 위협한다는 선입견을 두려워만 한다면 더 큰 공생의 기회, 포용적 성장의 가능성을 외면하는 셈이다. 진정한 지도자를 꿈꾼다면 생계형 자영업이 과밀하게 몰려 있는 도소매점·숙박·음식점들을 경쟁으로부터 격리하고 보호하는 것이 진정으로 그들을 위한 것인지 질문을 던져야 한다. 레드오션에 갇혀 언제까지나 정해진 파이를 나누는 게임에만 매몰된 일상에는 탈출구가 없다. 진정으로 그들을 위한다면 격리된 보호가 아닌 그들이 성장 사다리를 탈 수 있도록 판을 키우고 지원해야 한다. 서비스 빅뱅은 표를 깎는 정책이 아니라 표를 얻는 정책임을, 진정한 동반 성장의 길임을 이해하는 대권주자가 많을수록 한국 경제에 희망이 있다. 이제 한국의 통상정책은 한국산 제품을 해외로 수출하는 ‘밀어내기’ 위주에서 해외 소비자·인력·자본·기술을 한국으로 불러들이는 ‘끌어들이기’를 새로운 축으로 포함하게끔 리셋돼야 한다.

지금 당장은 중국의 사드 보복 공세가 거세어지고 있지만 한·중 경제관계는 더 강화되고 제도화돼야 한다. 발효된 지 1년 남짓한 한·중 FTA가 더 높은 수준의 서비스·투자 개방 약속을 담고 있었다면 중국의 지금과 같은 일방적 통상 보복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세계 최고의 통상국가이자 세계 최대의 소비시장으로 성장하게 될 중국과의 통상관계를 한국은 더 선진화해야 마땅하다. 한국인의 삶의 질을 위협하는 중국발 대기오염 역시 통상외교로 풀어야 할 시급한 과제다.

잃어버린 20년을 보낸 일본이지만 일본은 여전히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과 투자 재원을 가지고 있으며, 그 저력은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더욱 부각될 전망이다. 이런 국가들을 곁에 둔 한국은 이들의 강점을 기회로 활용하는 통상 전략을 구사해야 한다. 서비스 빅뱅의 국내적 동력을 기반으로 한국·중국·일본을 연결하는 역동적인 동아시아 경제 공간을 만들어내는 비전을 꿈꾸고 실천에 옮긴다면 한국은 매력적이고 역동적인 개방 국가로 우뚝 설 수 있을 것이다.

최병일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