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시론

지난해와 싹 달라진 미국 무역대표부 보고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9면

정철대외경제정책연구원무역통상본부장

정철대외경제정책연구원무역통상본부장

지난주 미국 무역대표부(USTR)가 발표한 미국의 2017년 무역정책 어젠다는 세간에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매년 이맘때 그해의 무역정책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 발표되는 미국의 무역정책 보고서가 이처럼 우리 언론으로부터 집중적으로 조명을 받는 것은 드문 일이다. 보고서에 수록된 내용 중에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직접적으로 언급된 점도 있지만 최근 트럼프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한 폭발적인 관심이 일부 반영됐을 것이다. ‘불확실성’과 ‘예측불가능’으로 요약되는 트럼프 대통령과 미국 신 행정부의 무역정책이 세계 경제와 우리나라 경제에 미칠 파급효과 때문이기도 하겠다.

지난해 미 무역정책 어젠다엔 #TPP 기대감으로 도배했지만 #올 보고서는 한 문장만 언급 #그래도 한·미 FTA 비관은 일러

미국의 무역정책 보고서는 대통령의 무역정책 어젠다로 명명된 것에서 보듯이 미국 정부의 무역정책을 홍보하고 국민과 의회의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는 측면이 있다. 예를 들어 오바마 대통령이 심혈을 기울인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의 비준과 발효를 위해 2016년 무역정책 보고서는 TPP의 특집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TPP의 필요성과 기대효과를 강조하는 데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또한 2015년과 2016년 무역정책 보고서는 형식 면에서도 예년의 보고서 형태를 벗어나 컬러풀한 홍보자료처럼 작성됐다. 반면 금년 보고서는 TPP를 단 한 문장에서만 언급하는 데 그쳤다. 바로 TPP 철회와 향후 TPP 국가들의 양자 FTA 협상 가능성이다. 트럼프 신정부의 정책 방향이 지난 정부와 크게 다를 것으로 전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실제로 2017년 보고서는 예년의 무역정책 보고서에 비해 공세적인 무역정책 수단의 활용을 강조하고 보다 적극적으로 정책을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세계무역 시스템 자체를 부정하거나 막무가내로 정책을 펴겠다는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세계무역기구(WTO)에서 합의된 규정과 WTO 규범에 기초해 미국 통상법상에서 허용된 범위 내에서의 조치들을 언급한 것이다. 자유시장의 원칙과 투명성을 강조한 것은 예년의 무역정책 보고서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 다만 미국의 1974년 통상법 301조를 언급해 수퍼 301조의 망령이 되살아나는 것에 대한 우려가 커진 것은 사실이다. 또한 반덤핑, 보조금에 대한 상계관세와 긴급수입제한조치인 세이프가드 등 불공정 무역행위에 대해 엄정한 무역구제 조치를 적극 활용하겠다는 정책 방향이 제시됐다는 점도 향후 통상 갈등이 고조될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한편 금년 미국 무역정책 보고서가 한·미 FTA를 언급한 것은 사실이지만 한·미 FTA 재협상을 명시한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이를 빌미로 한 과거 한·미 FTA 협상과 비준 과정에서 드러났던 거친 소모적인 논쟁은 지양해야 한다. 보고서는 중국이 WTO 회원국으로 가입하기 직전인 2000년과 2016년 통계를 비교하면서 미국의 상품무역수지 적자 확대, 가계의 중간소득(실질) 감소, 제조업 일자리 감소, 산업생산의 더딘 성장 등을 적시하고 현 국제통상체제가 중국에 대단한 이익을 가져다준 것에 비해 미국에는 그렇지 못했음을 강조했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과 한·미 FTA와 관련해서는 상대국들에 대한 미국의 무역수지 적자가 커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보고서에서 채택한 통계와 해석에는 견강부회(牽强附會)의 위험이 있다. 일례로 2011년과 2016년 사이에 우리나라의 전체 수입금액은 대미 수입에 비해 훨씬 크게 감소했으며 그 결과 미국 상품의 한국 수입시장 점유율이 2%포인트 이상 증가했음을 이 보고서는 간과하고 있다. 금년 3월 15일로 발효 5주년이 되는 한·미 FTA의 이행과 성과에 대해서는 양국 간 긴밀한 협의 과정을 통해 쟁점을 해소하고 정치한 분석에 기초해 객관적으로 평가가 이뤄져야 한다.

우리의 대응은 어떠해야 하는가? 지금은 무엇보다 침소봉대(針小棒大)를 경계하고 엄진이대(嚴陣以待·진지를 확고히 갖추고 적을 기다림)가 필요한 상황이다. 섣부른 예단과 과도한 우려에 따른 성급하고 어설픈 대응은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오히려 확대할 우려가 있다. 우리 정부는 미국 신정부와의 소통채널을 긴밀하게 유지하면서 아직 완전히 모양새를 갖추지 않은 미국 무역의 구체적인 정책 방안을 면밀히 파악해야 한다. 객관적인 사실과 증거에 기초한 대응논리도 꼼꼼하게 만들어 향후 불확실한 협상국면을 대비할 필요가 있다.

또한 중상주의와 힘의 논리가 판치는 근린궁핍화 정책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으며 국제무역을 통한 이익이 제로섬 게임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경제에서 무역이 차지하는 비중이 큰 우리 입장에서는 공정하고 원칙에 입각한 글로벌 통상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따라서 양자 간 통상 압력과 갈등의 수위를 낮추기 위해서라도 미들파워 국가들과의 국제적인 공조를 통해 다자간 협력의 중요성을 다시 부각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 통상 압박의 파고가 높아질 가능성이 커진 시점에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속담처럼 양자는 물론 다자 차원에서 냉철하고 전략적인 접근이 필요한 때다.

정철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무역통상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