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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최민우의 블랙코드

아카데미 사고가 한국이었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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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최민우 기자 중앙일보 정치부장
최민우문화부 차장

최민우문화부 차장

“수상자는 바로 김·재·전!”

1986년 한국 프로야구 골든글러브 시상식. 유격수 부문 시상자로 당대 톱스타 이보희가 나섰다. 그는 카드를 펼치고 잠시 멈칫거렸다. 그러고는 “김재전”이라고 호명했다. 이름이 한자로 명기돼 ‘김재박(博)’을 ‘김재전(傳)’으로 잘못 본 거다. 있을 법한 실수였다. 하지만 “역대 최악의 해프닝”이라며 여론은 들끓었다. ‘딴따라가 그렇지. 무식하잖아’란 선입견도 있었던 듯싶다.

한자 헷갈리기는 애교로 봐줄 만한 대형 사고가 89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터졌다. 그것도 가장 영예롭다는 작품상에서 수상 번복이 일어났다. 미국도 꽤 시끌하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그럴 수 있지, 뭐”라며 태연한 표정이다. “정치에 정신 팔린 탓”이라는 트럼프 대통령만 빼고 말이다. 만약에 이런 사고가 한국에서 일어났다면.

①라라랜드의 ‘점거농성’=장난 쳐? 아니 수상 소감까지 하고 있는데 내려오라니. 게다가 ‘배우님’들까지 단상에 모셨는데, 이런 망신을 주면 어떡하느냐고. 저분들이 앞으로 우리 작품 하겠어? 6관왕인데, 감독상도 받았는데 작품상 아니라는 건 무슨 시추에이션? 이건 음모야. 심사과정 명명백백히 공개할 때까지 내려갈 수 없어.

②문라이트의 ‘수상거부’=흑인 동성애 영화에 상 주는 게 그토록 고까웠나? “아카데미는 편견이 없다”는 생색내기 차원에서 한두 개 주려 했는데 덜컥 작품상 받으니 ‘깜놀’ 했겠지. 게다가 백인주의를 내세운 새 정부 ‘블랙리스트’에 우리가 있을 테니 눈치도 보였을 테고. 그렇다고 막판에 이런 식으로 김새게 하다니. 에잇, 치사해서 이딴 상 안 받을란다.

③워런 비티(시상자)의 ‘고소’=영화 인생 56년에 이런 치욕이라니. 난 배우로도 감독으로도 최고였다고. 그랬으니 1만2775명의 여성과 잠자리를 하지 않았겠냐고. 이건 ‘여혐’에 사로잡힌 이가 저지른 악의적인 불장난임에 틀림없어. 수사해야 돼!

아카데미상 이튿날 국내에선 14회 한국대중음악상이 열렸다. 대중성보다 음악성을 잣대로 해 인디음악이 조명받곤 했다. 이날 ‘최우수 포크 노래상’을 받은 가수 이랑씨는 “상금이 없다. 트로피 팔겠다”며 현장에서 즉석 경매를 진행해 50만원을 챙겨갔다. 음악계 현실에 대한 일침일 수도 있으나 상의 권위를 스스로 조롱한 꼴이었다.

“한국엔 왜 아카데미, 그래미 같은 시상식이 없나”란 푸념이 많다. 불편한 진실이지만 정치는 그 나라 민도를 드러낸다고 한다. 마찬가지다. 예술계 수준을 보여주는 건 바로 시상식이다.

최민우 문화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