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출판에 한글문화 뿌리내린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출판에 한글문화가 뿌리내리고 있다. 출판이 한 시대·사회의 생각과 말을 드러내주는 「글의 문화」라고 할때 70년대까지만 해도 한자문화가 지배적이었던 우리 출판을 80년 대들어 한글문화가 주도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책의 생산자」인 저자·출판인과「책의 소비자」인 독자 대부분이 한문세대·일본어세대에서 해방이후 한글교육을 받은 이른바 「한글세대」로 교체됐음을 의미한다. 같은 논리로 이같은 흐름이 갈수록 빠르고 넓어질 것을 예측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한글날을 맞아 출판의 한글화가 어디까지 진행되고 있는지 살펴본다.
한글문화의 확산을 뒷받침해 주는 변화들은 먼저 저자·출판사·책의 이름이 점차 한글화 되어가고 있다는데서 보여진다.
우선 문인들의 이름표기에 변화가 일고 있다. 70년대에서는 김현·송영·호영송·양성우·신대철 등에 불과했던 한글이름 표기문인들은 80년대 들어서면서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 이인성·최수철·임철우·유적룡·이승우·이병천·최승호·김용택·황지우·박덕규·고운기·안도현·강정일·김영승·이남호·정과리·진형준·권오룡 등을 포함, 현재 1백 여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출판사들의 이름 역시 70년대 말부터 순 우리말 붐을 이루기 시작, 한길사·까치·풀빛·거름·나남·돌베개·마당·한울·동녘·녹두·아침·한겨레 등이 생겨났으며 앞으로 출판사등록 자유화가 이루어지면 순 우리말 이름의 출판사들은 훨씬 늘어날것으로 보인다.
책이름의 한글화는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 우선 책이름들이 길어지고 있으며 특히 한문으로는 표기가 불가능한 문장화(문장화) 추세가 급격히 늘고 있다.
78년 출간된 성좌동인시집『왜 뱀은 구르는 수레바퀴 밑에 자기머리를 집어넣어 말벌과 함께 죽어버렸는가』라는 32자의 긴 제목이후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황동규)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이성복) 『아니다 그렇지않다』(김광규)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황지우) 『모여서 사는것이 어디 갈대들뿐이랴』(마종기) 등으로부터 최근 나온 『새들은 황혼 속에 집을 짓는다』(장석주) 『바람부는 솔숲에 사랑은 머물고』(고재종)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오규원) 등은 모두 문장화된 한글이름의 시집들이며 소설집에서도 유사한 경우를 찾기는 어렵지 않다.
한자표기의 성역처럼 여겨졌던 평론집에도 한글화 추세는 예외가 아니어서 근래 들어 『책읽기의 괴로움』(김현) 『인간아 인간아』(정현기) 『한심한 영혼아』(이남호) 『한 완전주의자의 책읽기』(장석주)까지 나오고 있다.
인문·사회과학 서적의 경우 이같이 파격적인 책이름은 『여자란 무엇인가』 『아름다움과 추함』 등 소수에 불과하나 대신 한자제목의 한글표기나 본문의 한자추방 등을 통해 한글화 추세를 따라가고 있다.
현재 서점에 나와 있는 인문·사회과학 서적들은 대학교재 등을 제외하면 90%이상이 본문을 한글로 쓰고있으며 의미가 불분명해질 경우에만 부득이 한글뒤의 괄호속에 한자표기를 하고 있다. 한길사가 79년에 펴낸 『해방전후사의 인식I』과 85년에 펴낸 『해방전후사의 인식Ⅱ』는 그간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같은 출판의 한글화 추세에 대한 설명은 문학평론가 정현기씨의 다음과 같은 견해로 요약된다.
『우리말을 배우며 자라난 젊은 세대가 한자보다 한글을 빨리 읽고 쉽게 이해하며, 그만큼 친숙함을 느끼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출판은 사회의 문화적 분위기를 고스란히 반영하며, 바꿔 말하면 한 시대의 의식구조를 이해하는 가장 빠른 길은 출판현상을 읽어보는데 있다.』 <기형도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