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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정호의 직격 인터뷰] 학자들을 밀실에 가두면 그들 간의 권력화 이뤄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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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제국의 위안부』 1심서 무죄 받은 박유하 교수

세상에는 기존 관념에 정면으로 도전해 격렬한 논란을 불렀던 책들이 적잖다. 진화론을 설파한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 지동설을 제시한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의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 등이 바로 그런 예다. 이런 기념비적 명저는 아닐지언정 일제 식민지사를 새로운 각도에서 접근한 책 『제국의 위안부』도 큰 논란을 일으켰다. 이 책이 나오자 위안부 할머니들은 자신들을 ‘자발적 매춘부’로 몰아 결정적으로 명예를 실추시켰다며 저자인 박유하(60) 세종대 교수에 대해 민형사 소송을 제기한다. 박 교수는 지난해 1월 민사소송에서는 졌지만 1년여의 공방 끝에 결국 형사재판 1심에서 지난달 말 무죄를 선고받았다. 위안부 동원의 진실은 무엇이고 학문의 자유는 어디까지 보장돼야 하는가. 이렇듯 큰 울림의 질문을 던진 사건의 주인공 박 교수를 지난 7일 만났다.

‘자발적 위안부’ 논쟁을 일으켰던 박유하 교수가 지난 7일 무죄 판결을 받은 서울동부지원 앞에서 인터뷰를 가졌다. 박 교수는 논란의 불씨가 된 자신의 저서 '제국의 위안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 조문규 기자]

‘자발적 위안부’ 논쟁을 일으켰던 박유하 교수가 지난 7일 무죄 판결을 받은 서울동부지원 앞에서 인터뷰를 가졌다. 박 교수는 논란의 불씨가 된 자신의 저서 '제국의 위안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 조문규 기자]

무죄 판결을 받은 소감은.
“무엇보다 안도했다. 판사가 합리적으로 재판을 진행한 데다 명예훼손의 기준으로도 걸릴 게 전혀 없어 무죄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과연 판사가 독자적인 판단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없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언론을 비롯해 여러 보이지 않는 압력이 작용했을 터인데 판사가 이를 이겨내 참으로 반가웠다. 최후 진술에서 ‘한국 사회에 정의가 살아 있음을 보여달라’고 말했는데 이 호소가 받아들여진 셈이다.”
이번 판결의 요지는 무엇인가.
“언론에서는 ‘틀린 의견이라도 보호할 가치가 있다’는 게 판결의 핵심이라고 보도했는데 이는 전체 내용이 아니다. 정확히는 ‘옳은 의견만 보호를 받는다면 의견의 경쟁이란 존재할 수 없으며 학술적 의견이 옳고 그른지를 국가기관이 결정해야 한다. 이는 법원의 영역을 벗어난 일’이라는 내용이 덧붙여져 있다. 정말 맞는 판단이다.”
재판 과정은 어땠나.
“지난해 1월부터 12월까지 딱 1년간 10번 정도 재판이 열렸다. 주변 사람 대부분 부정적으로 이야기했지만 결국 승소했다. 여기에는 담당 판사가 합리적으로 진행한 덕이 컸다고 본다. 준비재판 때 판사가 직접 브리핑 자료를 만들어 스크린에 관련 내용을 보여주면서 ‘이 같은 명예훼손 기준에 해당되는지 살펴보겠다’고 설명해 줬다. 이런 경우는 거의 없다고 들었다.”
 ‘제국의 위안부’ 필화사건으로 기소됐다 1심에서 무죄 판결 받은 박유하 교수를 7일 서울 자양동 동부지원에서 만났다. 박 교수는 이날 인터뷰에서 “오해”라고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상한 사람으로본다며 웃음도 잃었다고 했다.

‘제국의 위안부’ 필화사건으로 기소됐다 1심에서 무죄 판결 받은 박유하 교수를 7일 서울 자양동 동부지원에서 만났다. 박 교수는 이날 인터뷰에서 “오해”라고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상한 사람으로본다며 웃음도 잃었다고 했다.

국민재판을 신청하지 않았나.
“처음에 국민재판을 하려고 했다 중간에 포기했다. 이 무렵 『제국의 위안부』를 비판하는 책이 믿을 만한 출판사에서 출간돼 나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이 나빠졌다고 생각했다. 새로 투입된 변호사도 안 하는 게 좋겠다고 했고.”
일본에서도 큰 화제가 됐었다. 일본 측의 반응은.
“어떤 책을 읽고 그 내용을 전달할 때는 크고 작은 왜곡이 있기 마련이다. 전해지는 과정에서 당사자의 뜻과 많이 달라진다. 얼마 전 마이니치신문도 내 책과 관련해 보도했는데 소녀상 문제와 연계해 썼더라. 마음에 안 들었다. 개인적으로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은 정치적 사안과 나를 연결하면 마치 내가 그 칼럼을 쓴 사람과 같은 생각을 하는 것처럼 보일 것 아닌가.”
가장 괴로웠던 적은.
“2013년 여름에 책을 냈을 때에는 관련 학회와 위안부 지원단체 등에서 내 주장을 검토한 뒤 생각을 좀 바꿔주기를 기대했었다. 하지만 그런 반응은 전혀 없었다. 좀 더 들여다보면 이번 사태의 저변에는 진보적 지식인들 간의 갈등이 깔려 있다. 이미 9년 전부터 한 진보적 언론에 나에 대한 왜곡된 비판이 실리기 시작했다. ‘박유하가 말하는 화해란 피해자를 비난하는 것이고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들이 지지하니 철저히 저항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한국의 진보층 속에 나에 대한 불신을 심는 작업을 했던 것이다. 기소 후에는 나를 돕는 진보 지식인마저 우경화됐다고 공격했다. 내가 일본 돈을 받았다는 글이 실린 적도 있었다.”
많이 힘들었나.
“계속 우울증 비슷한 증세에 시달렸다. 지금도 자극을 받으면 눈물이 난다(순간 박 교수의 눈가에 물기가 어렸고 그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지지해준 이도 적지 않았다고 들었다.
“가장 나를 옹호해 준 이들은 주로 생면부지의 페이스북 친구들이었다. 이들은 나의 다른 책 또는 번역서를 봤거나 직감적으로 ‘이건 아니다’고 생각한 젊은 기업가 등 다양한 직종의 사람들이었다. 이런 소중한 존재들로 인해 희망을 느꼈다. 문제는 생각을 하지 않는 압도적 다수다. 이번 일을 계기로 우리 사회의 문제를 많이 볼 수 있었다.”

박 교수가 이번에 무죄를 받긴 했지만 그의 앞길은 여전히 험난하다. 검찰에서 1심 선고 즉시 항소해 앞으로 2심, 그리고 대법원 최종 판결을 기다려야 할 공산이 크다. 그럼에도 이번 무죄 판결에는 묵직한 의미가 담겨 있다. 판결문에서 나타나듯 학문의 자유는 광범위하게 보호받아야 한다는 원칙이 재확인됐기 때문이다. 『제국의 위안부』 사건이 최종적으로 어떻게 마무리될지 끝까지 지켜봐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우리 공동체에서는 사회적 분열이 큰 문제다.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배경에는 어릴 적 소위 ‘양공주’로 불리는 미군 상대 접대부에 대한 책을 읽은 게 계기였다. 나의 가장 큰 바람은 우리 안의 분열을 조화롭고 평화스럽게 해결하는 것이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연구도 나의 영역 내에서 갈등과 관련된 사안을 다룬 것에 지나지 않다.”
위안부 연구에서 가장 큰 문제점이라면.
“이번 최순실 사태에서 보여지듯 지금 우리 사회는 숨겨져 왔던 병폐를 계속 드러내고 있다. 이번 제국의 위안부 논란 역시 한국 사회의 한 병폐가 드러난 것으로 봐야 한다. 위안부 문제는 지난 20여 년간 계속 논란이 돼 왔음에도 국내에는 관련 전문가라고 꼽을 인물이 많지 않다. 그만큼 관련 연구가 충분히 돼 있지 않다는 의미다.”

언론, 학자 간 토론 경청해야
올바른 판단 위해 전달도 중요
가족 위해 스스로 간 경우도 있어
매춘부라 손가락질할 수 없다 

 ‘제국의 위안부’ 필화사건으로 기소됐다 1심에서 무죄 판결 받은 박유하 교수를 7일 서울 자양동 동부지원에서 만났다. 박 교수는 이날 인터뷰에서 “오해”라고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상한 사람으로본다며 웃음도 잃었다고 했다.

‘제국의 위안부’ 필화사건으로 기소됐다 1심에서 무죄 판결 받은 박유하 교수를 7일 서울 자양동 동부지원에서 만났다. 박 교수는 이날 인터뷰에서 “오해”라고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상한 사람으로본다며 웃음도 잃었다고 했다.

이번 사태로 절감한 게 있다면.
“언론이 얼마나 태만한지 느꼈다. 위안부 지원단체가 나를 고발하면서 ‘박 교수가 위안부 할머니들은 자발적 매춘부이며 피해자가 아니다라고 썼다’고 주장했다. 사실이 아닌데도. 하지만 이와 관련해 나에게 직접 확인한 언론은 거의 없었다. 그나마 연락해 온 매체들도 제대로 된 내용을 내보내지 않았다. 지금까지 내가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아무리 재판에서 이겨도 언론이 계속 나를 나쁘다고 하면 명예회복이 어떻게 되겠는가. 아직도 나에 대해 비판적인 언론의 태도는 전혀 바뀌지 않았다. 나의 판결 후 웃는 얼굴을 이상하게 편집해 내보내기도 하고.”
그럼 뭐라고 썼는가, 자발적 매춘부도 있을 수 있다고 썼나.
“아니다. 자발적 매춘부라고 쓴 사람을 비판하기 위해 인용한 것뿐이다. 물론 전체적으로 봤을 때 자발적으로 간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을 안 쓰진 않았다. 위안부가 전쟁터에 가게 된 과정을 놓고 그간에는 강제연행이란 표현이 사용돼 왔다. 이를 근거로 국가가 법적 책임을 져야 한다고 요구했던 것이다. 문제는 일단 이렇게 규정하고 난 뒤 단 한 번도 재고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스스로 간 위안부는 어떤 사람일까.
“자발적으로 간 사람들 중에는 가족을 위해 희생한 경우가 많을 것이다. 나는 이 점을 강조하고 싶다. 실은 1996년에 작성된 유엔 보고서 내에도 매춘 이야기가 나온다. 이런 포괄적 이야기가 우리에게 전달되지 않고 있다. 옛 기준에 맞춰진 것만 전달돼 왔던 것이다. 시대 여건상 자발적 매춘이라고 해도 누구도 손가락질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이들을 비난한다면 있는 그대로 보지 않으려는 태도 때문이다. 여기엔 남자들의 책임도 크다. 알지 않느냐. 매춘에 대한 남자들의 편견이 어떤지. 매춘부란 표현에는 이미 차별적인 요소가 담겨 있다. 이런 사고방식 때문에 위안부는 소녀가 아니면 안 되는 거다.”
‘학문의 자유’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물론 지켜져야 한다. 다만 이번 사건은 학문의 자유가 아닌 사실관계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나를 폄하했던 학자들은 성명서를 통해 ‘학문의 자유는 지켜져야 하지만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면서까지는 아니다’고 했다. 그러기에 나는 명예훼손을 한 게 아니라고 반박했던 것이다.”
그럼 위안부 논의는 어떻게 이뤄지는 게 바람직할까.
“학자들끼리 토론을 시킨 뒤 언론이 이를 경청하고 제대로 전달하는 게 필요하다.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논란이 뭔지, 그리고 누가,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국민이 보고 판단할 수 있게 해야 한다. 20년 전에는 위안부가 강제연행된 걸로 돼 있었다. 하지만 긴 세월 연구가 진전되면서 인신매매가 중심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는 관련 학자라면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위안부 지원단체들은 외부에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고 있다. 나는 그것을 국민 동원이라고 말했다.”

한국인들 자기주장 너무 강해
의견 다르다고 쳐버려선 곤란
국내 위안부 연구 몹시 빈약해
자료 모아 연구 서적 또 낼 것

한·일 문제는 어떻게 접근해야 하나.
“역사를 둘러싼 논란과 갈등은 있을 수 있지만 분명한 팩트(사실)는 있기 마련이다. 다만 이를 어떻게 바라볼 것이냐 하는 관점은 다를 수 있다. 동일한 사안에 대해 누구는 긍정적으로, 누구는 부정적으로도 볼 수 있지만 그럼에도 팩트는 제대로 알아야 한다. 문제는 우리의 주장이 너무 경직돼 있다는 사실이다. 초기 주장을 지키려 하다보니 무리가 생긴다.”
해결 방법은.
“학자들을 밀실에 가둬 두면 이 안에서 권력화가 이뤄진다. 이로 인해 나오는 목소리, 안 나오는 목소리가 생긴다. 그냥 화해하고 끝내자는 이야기도 있지만 위안부 할머니 당사자들을 포함해 학자, 지원단체들이 서로 토론한 내용을 언론이 경청한 뒤 이를 사회 곳곳에 전달해야 한다.”
향후 계획은.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이 책 외에 다른 것을 쓸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이 책을 쓴 뒤 내 주장을 오해하고 비난하는 사람이 여전히 많아 이번 책에서는 사용하지 않았던 자료, 그리고 재판 이후 알게 된 내용들을 합쳐서 새 책을 낼 생각이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현재 우리는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한국은 심각한 위기 상황이다. 정말 고립돼 있다. 일본은 물론이고 대만도 우릴 싫어한다. 미국·중국도 호의적이지 않지 않으냐. 경제도 나쁘지만 정치적 고립이 정말 심각하다. 분열이 너무 심하고 에너지를 쓸데없는 곳에서 낭비하고 있다. 우리는 자기주장이 너무 강하다. 좋게 말하면 자아가 강하지만 사고방식이 지나치게 경직돼 있어 반대 의견은 죽이거나 쳐버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어떤 문제를 놓고 싸우는 건 좋은데 이 땅에서는 그 과정에서 소모하는 게 너무 많다. 멀쩡한 사람을 2년 반 동안이나 정신적·육체적, 그리고 금전적으로 이렇듯 손실을 보게 하는 것은 너무나 소모적인 일이다.” 

박유하 교수는 …

서울 출생. 고등학교 졸업 후 일본으로 건너가 게이오대(慶應大)를 마친 뒤 와세다대(早稻田大)에서 일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郞),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 등 일본 지식인의 작품을 번역, 소개해왔다. 민족주의를 넘어선 한·일 간 협력 및 동아시아의 역사 화해를 위한 연구에도 참여하고 있다. 2007년에는 일본 아사히신문이 사회과학 분야의 수준 높은 저작물에 수여하는 ‘오사라기 지로(大佛次郞) 논단상’을 한국인 최초로 수상하기도 했다. 현재 세종대 일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글=남정호 논설위원

사진=조문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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