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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 게임 같은 영화? 비주류에게 응원을!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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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게임 속에선 고수지만, 현실에선 평범한 백수인 20대 청춘 권유(지창욱). ‘조작된 도시’(2월 9일 개봉)는 누군가의 조작 때문에 희대의 흉악범으로 몰린 권유가 인터넷 게임 길드 ‘레쥬렉션’ 멤버들의 도움으로 진실을 파헤치는 과정을 따라간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차량 추격전, 스펙터클한 폭발신, 리얼한 격투 장면 등 화려한 액션이 관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영화 '조작된 도시' 박광현 감독 인터뷰

여기에 개인 정보를 수집해 감시하는 사회, 청년 실업을 바라보는 세상의 편견 등 현대 사회의 여러 문제에 대한 비판적 시선까지 담았다. 한국전쟁 당시 강원도 산골에 고립된 남북한 병사들의 이야기를 다룬 휴머니즘 코미디 ‘웰컴 투 동막골’(2005, 이하 ‘동막골’)로 관객 800만 명(공식 집계 기준)을 동원한 박광현(47) 감독. ‘조작된 도시’는 그가 무려 12년 만에 내놓은 복귀작이다.

‘조작된 도시’의 개봉일인 2월 9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박광현 감독을 만났다. “밤잠을 설쳤다”는 그의 얼굴엔 신작 공개를 앞둔 흥분과 기대감이 엿보였다. 오랫동안 매달렸던 액션영화 ‘권법’의 제작 난항으로 꽤 속앓이가 심했을 테지만, ‘조작된 도시’를 내놓은 그의 표정은 무척 여유로워 보였다.

-장장 12년 만의 신작이다. 개봉을 앞둔 감회가 남다를 것 같은데.

“솔직히 말하면 좀 더 감격스러울 줄 알았다(웃음). 워낙 오랜만이라 그런지, 지금은 무척 긴장될 뿐이다. 영화감독이 작품을 만드는 건 일종의 직무일 텐데, 그런 면에서 보면 난 꽤 오랫동안 직무 유기를 해 왔다는 생각이 새삼스레 들더라.”

-‘조작된 도시’를 작업하게 된 계기는.

“‘조각된 남자’라고, 한때 충무로에서 이름깨나 돌던 시나리오가 있었다. ‘공무원을 꿈꾸던 고시생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살인 누명을 쓰고 피의 복수를 계획한다’는 현실적인 내용의 스릴러영화였다. 나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인 것 같아 선뜻 연출을 맡겠다고 나서지 못했는데, ‘매번 똑같은 영화만 만들지 말고 외연을 확장해 보라’는 지인의 말에 자극받았다. 원작 시나리오대로 갈 생각은 없었다. 원작자의 허락을 받고, 이야기의 기본 구조만 남긴 채 모든 설정을 바꿨다.”

-액션뿐 아니라 코미디, 판타지 첩보물 등 여러 장르의 요소가 눈에 띈다. 어떤 장르로 생각하고 접근했나.

“‘범죄·어드벤처영화’다. 줄거리상 스릴러 장르가 잘 어울릴 것 같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누명을 뒤집어쓴 한 남자가 범죄자로 몰려 지옥의 바닥까지 추락했다가 다시금 명예를 회복하는 이야기다. 그 여정을 모험담처럼 그리고 싶었다. 전쟁이 소재인 ‘동막골’을 통해 그와 대치되는 개념인 휴식과 평화를 다뤄 보고 싶었다면, ‘조작된 도시’에서는 범죄영화라는 장르를 통해 희망을 얘기 하고 싶었다.”

-인터넷 게임이 이 영화의 중요한 모티브다. 게이머의 세계를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했을 것 같다.

“사실 난 게임에 별 소질이 없다(웃음). 옆에서 구경하는 것이 더 재미있다. 이 영화를 만들며 경험 삼아 몇 판 해 봤는데, 영 어려워서 못하겠더라. ‘게임 속 영웅이 현실에서 영웅일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조작된 도시’의 첫 단추였다. 게임 고수들의 문제 해결 능력과 반응 속도가 현실에서도 유효할지 궁금했다.”

-백수인 주인공 권유뿐 아니라, 그의 결백을 입증하려는 ‘레쥬렉션’ 멤버 모두 사회에서 홀대받는 비주류들이다.

“각색 초기 단계부터 그 부분을 염두에 두고 캐릭터를 만들어 갔다. 지방 소재 대학의 교수, ‘열정페이’로 일하는 영화 제작 스태프, 인터넷 성인 방송 VJ 등 어찌 보면 그들은 사회의 변두리에 위치한 ‘루저’다. 대인기피증이 있는 천재 해커 여울(심은경)도 같은 축에 속하겠지. 하지만 그런 분류는 이 사회가 강요하는 기준일 뿐이다. 주류 사회에 섞이지 못한다고 해서 무능력하거나 나쁜 사람은 아니잖나. ‘조작된 도시’에서는 사회로부터 차별받은 이들이 힘을 합쳐 사건을 해결해 간다. 그 과정을 지켜보며 관객도 함께 희열을 느낄 거라 생각했다.”

-가장 심혈을 기울여 촬영한 장면은.

“권유가 어둠 속에서 쌀을 던져 적들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제압하는 ‘쌀알 액션 장면’이다. 우리 몸이 소리를 인식하는 과정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청각의 시각화랄까. 하지만 이 생각을 다른 스태프와 정확히 공유하는 데 무척 어려움이 많았다. 개봉 직전인 최근에서야 그 장면을 완성할 수 있었다. 3년 정도 시행착오를 거쳐 탄생된 장면이기에, 완성도를 떠나 무척 애착이 간다.”

-극 중에서 권유가 겪는 고난은 무척 처절하게 그려진다. 반면 권유와 ‘레쥬렉션’ 멤버들이 작전을 수행하는 과정은 코믹하고 경쾌하게 흐른다. 상반된 톤을 동시에 녹인 까닭은.

“지창욱도 촬영 현장에서 내게 같은 질문을 했다. 권유의 상황은 무척 심각한데, 그 다음 장면에 바로 코믹한 상황이 이어져도 괜찮겠냐고. 하지만 나는 그동안 한국영화들이 ‘현실적’이란 개념을 다소 극단적으로 설정해 왔다고 느낀다. 당장의 내 처지가 슬프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이 24시간 나와 함께 슬퍼해 주지는 않잖나. 상반된 두 가지 톤이 섞인 상황이야말로 실제 현실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과도한 폭력 장면, 산만한 메시지, 부족한 상황 설명 등 ‘조작된 도시’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적잖다.

“개인적으로 나는 무척 직관적인 영화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이들에게는 꽤 즐겁고 정교한 작품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의 논리적 구조만을 따진다면, 무척 유치하고 엉성한 영화처럼 느껴질 가능성도 크다. 이처럼 양분된 관객 반응이 흥미롭다.”

-12년 만의 복귀작이 감독 개인에게 던지는 의미는 뭘까.

“최근 몇 년간 내 삶은 이 영화와 무척 닮아 있다. 운 좋게 데뷔작이 잘되는 영광을 누렸다가, 차기작이 여러 번 엎어지면서 순식간에 밑바닥으로 떨어졌으니(웃음). 결혼 생활이 파탄 날 위기도 겪었다. 힘든 시간을 보내다 정신을 차려 보니, 우리 사회의 젊은 세대 역시 사회로부터 홀대받고 무시당하는 입장에 처해 있더라. 늘 열정과 패기가 넘치던 청춘들이 무기력해지는 모습을 보면 몹시 안타깝다. ‘조작된 도시’를 통해 젊은 세대의 손을 잡고, 다시금 ‘파이팅’을 외치는 것이 내가 할 일인 듯하다(웃음).”

박광현 감독이 그리는 현실과 판타지 사이

박광현 감독이 창조한 영화 세계는 현실과 허구 사이의 어디쯤에 있다. 영화 속 이야기는 철저히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이지만, 그 안에는 현실에서 보기 힘든 기이한 사건들이 일어난다. 마치 ‘동막골’에서 ‘팝콘 비’가 내리던 동화적 장면처럼 말이다. 박 감독은 “내 영화가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한 적 없다. 다만 현실에서 한 발짝 떨어져 있을 뿐”이라 말했다.

‘조작된 도시’에서 교도소에 수감된 권유가 맞닥뜨린 상황은 매우 처절하게 묘사된다. 돌이켜 보면, ‘동막골’에서 군인들이 촌장을 폭행하는 장면 묘사 역시 무척 가혹했다. ‘동막골’에 참여한 일본의 음악감독 히사이시 조는, 그 장면을 보고 나서 박 감독에게 “당신에게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과 기타노 다케시 감독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 같다”고 말했을 정도. “영화는 팩트가 아닌 한 사람의 생각과 감정에서 출발해야 한다. 한국 영화계에는 유독 ‘현실성을 따라야 한다’는 불문율이 강한 듯하다. ‘나’라는 사람의 특성은 내 영화에 그대로 묻어난다. 현실과 공상, 선한 마음과 악마성, 열정과 패기 그리고 변태스러움이 한데 뒤엉킨 형태로(웃음).”

고석희 기자 ko.seokhee@joongang.co.kr 사진=라희찬(STUDIO 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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