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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중산층으로 … ' 아름다운 귀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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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차 버스 기사 '맹순이' 이순희(52)씨가 남편 이동신(60)씨와 함께 시댁을 찾았다. 외환위기 때 남편 사업이 부도나 바닥까지 추락해 차마 찾지 못했던 시댁이다. 그는 다시 옛날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과 함께 귀향길에 올랐다.

'맹순이' 버스기사 이순희씨

'맹순이' 버스기사 이순희씨

50만원 빌려 운전면허
취업 1년 만에 집 장만
"올해는 시댁 찾아가요"

세상이 나를 버렸다고 생각했다. 큰 욕심 부리지 않고 정말 열심히 살았는데 어느 순간 길바닥 신세라니-. 아무리 망가져도 이렇게까지 될 줄이야. 한때는 '나 몰라라'하는 정부를 원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언제까지 세상 탓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마음을 고쳐 먹으면 세상도 달라지는 법, 지금은 다시 내 자리를 찾고자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아직 축배를 들기는 이르지만, 모처럼 고향에 돌아가 가족과 함께 희망을 얘기하고 싶다.

저는 '맹순이'입니다. 진짜 이름은 이순희지만 벌써 6년째 다니는 버스회사에선 다들 저를 그렇게 부른답니다. 올해 떡국을 먹고 나면 쉰둘인데도, 세상 물정을 몰라도 한참 모른다나요. 인생의 대부분을 집안 살림만 했으니 그네들 눈에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저, 맹하지 않습니다. 지금 내 머릿속엔 나만의 계획이 꽉 차 있거든요. 바로 우리 가정을 단란했던 옛날로 되돌리는 거죠. 중산층이란 소리를 듣던 그때로 말이죠. 그리고 벌써 그 꿈의 절반을 이뤘습니다. 꼭두새벽에 나가 밤늦게야 돌아오는 버스 기사 생활 1년 만인 2002년 경기도 하남시에 조그만 집도 장만한걸요. 대출이 반이지만 그래도 내 집 아닙니까. 외환위기 때 남편 사업체의 부도로 바닥까지 추락했던 걸 생각해 보세요. 정말 고마운 집입니다.

벌써 10년이 다 돼 가네요. 1997년에 닥친 외환위기. 수많은 다른 중산층의 보통 사람처럼 저 역시 이로 인해 제 삶을 송두리째 박탈당했습니다. 열심히 일했던 남편(60), 이제는 서른 살과 스물일곱 살이 된 두 딸, 그리고 귀여운 막내 아들(25)까지-. 풍족하진 않았지만 정말 남부러울 게 없었습니다. 남편이 벌어다 준 돈을 아껴 쓰며 아이들 뒷바라지하는 낙으로 살았죠.

그런데 남편이 운영하던 의류 봉제 업체가 부도나면서 제 인생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좀 더 잘 살아보겠다며 바로 전 해에 대출받아 들여온 석 대의 독일제 최신 봉제기계, 그게 애물단지가 돼 버릴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납품 업체의 부도로 기계는 놀고 대출 이자는 30%까지 뛰어올랐습니다. 이자라도 갚으려고 대당 1000만원이 넘는 기계를 100만원에 넘겼습니다. 기계를 팔면서 우리 가족의 꿈도 함께 팔려 나갔습니다. 남편은 화병이 나 누워 버렸고, 애들은 학교를 그만둬야 했죠.

아마 99년 겨울이었을 겁니다. 방은 얼음장처럼 찬데 연탄 살 돈이 없었습니다. 보다 못한 친정 오빠가 연탄 200장을 사 줘 겨우 그해 겨울을 날 수 있었죠. 방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굶어 죽든 얼어 죽든 죽을 것만 같아 일을 찾아나섰지만 정말 어렵더군요. 배운 것도 없는 전업주부를 누가 받아주겠습니까. 그렇다고 나라가 나서서 직업교육을 해주는 것도 아니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작 상자를 줍는 것이었습니다. 하루 종일 주워 고물상에 갖다 주고 2만~3만원을 벌었습니다.

그러다 2001년 봄 우연히 버스를 운전하는 아줌마를 봤습니다. 아, 여자도 버스를 모는구나. 당장 친구에게 50만원을 빌려 운전학원에 등록했습니다. 시험에 떨어지면 더 낼 학원비도 없었기에 이를 악물고 14일 만에 면허를 땄습니다. 그리고 그해 11월 서울 시내 한 버스회사의 운전기사가 됐습니다. 비록 몇 푼 되지는 않았지만 생전 처음 받아든 월급봉투를 끌어안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이제는 월급도 많이 올라 200만원이 넘습니다.

남편이 종갓집 차남이라 명절 때면 온 가족이 경남 울산에 있는 시댁에 갔지만 사업에 실패한 뒤론 그동안 한 번도 못 갔습니다. 핑계 같지만 주머니가 비니까 마음도 비더군요. 솔직히 망가진 형편을 보이기 싫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설에는 식구들과 함께 시댁에 갈 겁니다. 시부모님 산소에 술 한 잔 올리며 어른들께 용서를 구하렵니다. 아버님, 어머님, 사고 없이 정년(58세)까지 운전할 수 있도록 부디 도와주세요.

포장마차로 제2인생 정종일씨

한때 잘 나가던 사장님
동업자 원망도 했지만
"마음 비우니 내가 부자"

"여보, 이거 꿈은 아니지?" 고향 집에 가려고 오랜만에 한복을 차려입으며 아내에게 물었습니다. 아내 역시 모처럼 한복으로 치장하느라 상기된 표정이네요. 몇 년 전만 해도 고향에서 온 가족이 단란하게 설을 맞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외환위기 직후 잘나가던 사업이 망해 집까지 날리고 길바닥에 나앉게 된 게 원망스러워 세상을 등지려고까지 했답니다.

사업이 망한 뒤 공사장에서 막일을 하며 아내 몰래 2년 동안 매달 26만원씩 종신보험료를 냈습니다. 살기 위한 게 아니라 죽기 위해 든 보험이었습니다. 2년만 보험료를 내면 자살해도 가족에게 1억5000만원이 지급된다는 말에 솔깃했던 것이죠. 힘들 때마다 보험증서를 만지작거리며 참 고민 많이 했습니다. 4년 전까지만 해도 세상과 인연을 끊는 일만 생각했으니까요.

사실 저도 한때는 남부러울 것 없는 사장님이었습니다. 1984년 고향인 전남 영광에서 달랑 300만원을 들고 네 식구가 무작정 상경했지만 악착같이 벌고 안 쓴 덕에 꽤 많은 돈을 모았죠. 아내와 함께 화양동에 연 허름한 분식집이 10년 만에 꽤 큰 노래방이 됐고, 살림집은 분식집에 딸린 단칸방에서 58평 빌라로 커졌습니다. 그랜저를 몰면서도 더 큰 부자가 되겠다는 욕심에 사로잡혔을 정도니까요.

하지만 욕심이 화근이었습니다. 친구와 손을 잡고 스포츠센터 사업에 뛰어들었죠. 그때까지 그랬듯이 열심히만 하면 다 잘될 줄 알았습니다. 98년 동업하던 친구가 빚 3억원을 떠넘기고 달아나기 전까지는요.

빚은 늪처럼 제 인생을 끌어내립디다. 당장 압류가 들어오고, 전세금을 빼달라는 세입자 독촉에 잠을 잘 수 없었습니다. 결국 어렵게 장만한 집을 헐값에 팔았죠. 58평 빌라에서 방 두 칸짜리 월세로, 다시 노래방 지하실로 처박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많이 배웠다는 사람들도 직업을 잃고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마당에 이렇다 할 전문지식이 없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막노동뿐이었습니다.

할 수 없이 막다른 골목에서 생각해 낸 게 가족을 위한 종신보험이었죠. 종신보험을 2년만 유지하곤 죽을 거라 생각하니 길거리로 나가는 것도 부끄럽지 않습디다. 그래서 2002년 겨울 화양동에 포장마차를 차렸습니다. 바람이 불거나 눈이 오거나 곰장어를 구워 하루 3만~4만원을 벌었죠.

그런데 오후 4시에 일어나 다음날 오전 10시 잠자리에 드는 '올빼미' 생활을 1년쯤 하다 보니 문득 '꼭 죽을 필요가 있나'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들이켜는 손님을 보며 많은 생각을 했죠. 저만 나락으로 떨어졌다고 자학했는데 손님 중에는 저보다 더 힘든 이가 참 많았습니다. 저와 비슷한 시기에 중산층에서 극빈층으로 내동댕이쳐진 사람이 너무 많더군요. 어느 날인가 죽을 작정이면 못할 게 무엇이냐는 배짱이 생깁디다. 손님과 함께 "우리도 금방 다시 중산층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며 같이 운 적도 여러 번이었습니다.

다시 살아보겠다고 마음먹으니 좋은 일이 줄을 잇더군요. 단골이 생기면서 매출이 늘고, 과외 한번 못 시킨 딸 인혜(22)는 지난해 울산대 의대에 장학생으로 입학하는 일이 생기더군요. 종종 포장마차 일을 거드는 아들 인규(24)와도 훨씬 친해졌죠. 이제 부자가 되겠다는 욕심은 버렸습니다.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부자가 부럽지 않아요. 곧 옛날로 돌아갈 자신이 있습니다. 반드시 해내고 말 겁니다.

글=안혜리·고란·임미진 기자 <hyeree@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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