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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말의 해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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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황현산 문학평론가·고려대 명예교수

황현산
문학평론가·고려대 명예교수

‘일제시대’에 태어났으면 독립운동을 했을 텐데. 한국에서 민족주의 교육이 한창이던 1950년대나 60년대에 이렇게 말하는 초등학생들이 있었다. 그들은 도시락 속에 폭탄을 숨길 수 없었으며, 애석하게도 이국의 역 앞에서 비장하게 설 기회가 없었다.

이수명 비평집 『공습의 시대』

물론 과장이지만, 90년대에 등단하는 신인 시인들도 비슷한 생각을 품을 수 있었다. 그들은 10년 전에만 등단했어도 피할 수 있었던 고뇌 앞에 서 있었다. 이 땅은 그때 민주화의 중요 고비를 넘겼으며, 무엇보다도 동구권이 무너지고 현실 사회주의의 추악한 모습이 드러났다. 그들이 모두 사회주의에 희망을 건 사람들이 아니었을지라도 존 스타인벡의 소설 제목처럼 ‘생쥐와 인간’은 뾰족한 수가 없다는 것을 다시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이수명 시인의 비평집 『공습의 시대』(문학동네)는 90년대에 첫 작품집을 낸 시인들의 시집 열세 권에 관해 말한다. 이른바 사회참여시의 신용이 떨어진 자리에서 이 땅의 시가 얼마나 절망적으로 길 찾기를 하였는지 분석적으로 회고하는 책이다. 저자를 따라 몇 권의 시집을 우리도 다시 회고하자.

1994년 등단한 이수명 시인. 90년대 한국 시의 안팎을 들여다본 평론집을 발표했다. [중앙포토]

1994년 등단한 이수명 시인. 90년대 한국 시의 안팎을 들여다본 평론집을 발표했다. [중앙포토]

박상순의 시집 『6은 나무 7은 돌고래』는 사회에서 고립된 한 청년의 의식으로 이미 의미를 잃은 낱말들의 기호 놀이를 한다. 그에게 ‘새벽’은 이미 새 시대의 전조가 아니며 ‘폭풍’은 성난 해방전사들이 아니다. 그러나 이 놀이는 우리를 해방시킨다. 말의 은유적 가치를 부정하는 것도 일종의 혁명이기 때문이다.

함기석의 시집 『국어 선생은 달팽이』는 표면적으로는 국어책을 문제 삼지만, 그 비난은 수학책에 더 잘 들어맞는다. 배 한 척이 시속 20해리로 달려간다. 다른 배가 20해리 뒤에서 시속 22해리로 뒤쫓는다. 우리가 그 일을 왜 간섭해야 하는가. 쫓기 같은 것은 사실 없다. 이렇게 말하다 보면 결국 우리의 행동이 부조리하다고 말해야 한다. 그러니 애쓸 필요 없다. 또는 있다.

최정례의 시집 『내 귓속의 장대나무 숲』은 기억에 관한 시집이다. 그의 어머니는 ‘병점’에서 떡 한 점을 떼어먹고 그를 낳았으며, 가족들이 삶아 먹었던 내력이 그의 핏속에 있다. 기억으로 환치되는 인간의 모든 행위들은 의미가 깊어질수록 오히려 무의미하다. 깊은 맛이란 맛이 없는 맛이듯이.

장경린의 시집 『사자 도망간다 사자 잡아라』는 자본주의의 야전 교범이자 난중일기다. 여기서 사자는 이자(利子)다. 죽은 사물이 저절로 길어난다는 것, 그게 얼마나 신기한 일인가. 신기한 일은 시가 된다고 배웠는데 그보다 더 신기한 일이 있겠는가. 장경린은 그 자신이 은행원이기도 했다. 시인은 모든 상처를 다 시로 바꾼다.

저자가 이야기하지 않은 시집 한 권만 더 이야기하자. 저자 그 자신의 시집 『왜가리를 왜가리놀이를 한다』. 간단히 말해서 이 시집은 꿈속에 들어갈 수 없는 시인이 어떤 계획에 따라 그 꿈속으로 들어가는 ‘꿈의 시나리오’다. 어떤 일도 꿈에서는 가능하고 영화에서는 가능하다. 그것이 90년대의 발견이었다.

황현산 문학평론가·고려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