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사공일의 글로벌 인사이트

다보스의 시진핑과 백악관의 트럼프 - 혼돈 속의 세계 질서 -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8면

사공일 중앙일보 고문·전 재무부 장관

사공일
중앙일보 고문·전 재무부 장관

다보스맨(Davos man)은 새뮤얼 헌팅턴 교수의 신조어로 국경에 얽매인 국가보다 세계경제의 통합과 번영에 더욱 집착하는 국제 엘리트를 지칭하며 그들의 대부분은 세계화의 이점을 최대한 누리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국가 주권을 되찾자’는 영국의 브렉시트 결정에 이어 ‘위대한 미국 재건’이라는 국가주의적 슬로건을 앞세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반세계화와 기존 국제 질서를 뒤흔드는 보호주의적 행동에 난처하게 된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중국 겨냥 트럼프 신보호주의로 세계경제 혼란 불가피
범정부 차원 통상정책 기획조정기구 등 대책 서둘러야

그래서 그들은 올해 초 다보스포럼에 중국의 시진핑을 초청해 세계화의 기치를 들어줄 것을 기대했다. 실제 중국은 개방과 세계화로 불과 한 세대(世代) 만에 6억이 넘는 국민을 절대빈곤에서 구해냈을 뿐 아니라 세계 제2 경제대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

다보스에 온 시진핑은 적어도 수사(rhetoric) 차원에서는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보호주의는 자신을 어두운 방 안에 가둬두는 것과 같다…우리는 개방을 통한 무역과 투자 자유화를 촉진하고 보호주의를 거부해야 한다”며 개방과 세계화를 역설했다. 그러나 시진핑은 세계화를 강조하는 대목마다 ‘경제적’이란 수식어를 빠뜨리지 않았다. 외부 웹사이트와의 우회 접촉마저 단속함으로써 ‘자국민을 방 안에 가두려는’ 반세계화적 국내 시책들을 의식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보호는 큰 번영과 힘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트럼프 대통령 취임사의 보호주의 수사와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상마저 할 수 없었던 글로벌 리더십의 현실이다.

지구촌이 당면한 문제는 중국의 현실이 시진핑의 다보스 세계화 수사를 따라주지 못할 것인 반면 트럼프의 반세계화 행동은 놀라울 정도로 신속하며 큰 이변이 없는 한 앞으로 4년간 지속될 것이라는 데에 있다. 그 결과 기존 세계 질서는 앞으로 상당 기간 혼돈과 불안에 휘말릴 수밖에 없게 돼 있다.

[일러스트=김회룡]

[일러스트=김회룡]

트럼프는 미국은 더 이상 세계 모든 나라들이 자기들의 이익만을 위해 미국을 이용하려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뿐 아니라 기존 국제 질서 유지에 무임승차(free ride)를 허용하지 않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의 불공정한 경쟁을 ‘자유무역’이란 미명으로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특히 중국에 초점이 맞춰진 것임이 분명하다.

중국이 정부의 자국 기업 특히 국영기업에 대한 직간접적인 지원, 환율시장 개입, 국제 수준에 맞지 않는 노동·환경 조건 등에 힘입은 불공정한 경쟁으로 미국 경제, 특히 제조업 경쟁력을 떨어뜨리고 일자리를 빼앗아가는 상황을 막겠다는 것이다. 전혀 근거 없는 엉뚱한 주장만은 아니다.

이제 곧 미국은 ‘국경조정세’나 관세 부과 등과 함께 각종 중국 제품의 수입 제재에 나설 것이다. 물론 중국도 중국 진출 미국 기업에 대한 각종 제재, 미국 재무성 증권 등 미국 금융자산에 대한 투자 조정 등을 통한 보복으로 맞서게 될 것이다.

자칫하면 세계 경제는 1930년대의 ‘근린궁핍(beggar-thy-neighbor)’ 정책의 함정에 빠질 가능성마저 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그동안의 패권국이었던 영국은 국제 질서를 계속 이끌어 나갈 ‘능력’이 모자랐던 반면, 미국은 ‘능력’은 있었으나 글로벌 리더십을 발휘할 ‘의도’가 없었다. 그 결과 국제 무역과 환율 안정 등에 관한 합의를 위해 1933년 런던에서 66개국 대표가 모였던 ‘런던경제회의’마저 실패로 돌아갔고 세계경제 대공황의 회복은 늦어지고 세계는 2차대전마저 치르게 됐다.

아직 중국은 미국을 대신해 글로벌 리더십을 발휘할 능력도 부족할 뿐 아니라 그럴 의지는 더더욱 없다. 그러나 다행히 현재 세계는 1930년대와는 크게 다르다. 그동안 급속히 진행돼 온 세계화와 세계경제의 깊은 통합으로 심한 무역·환율 갈등이나 전쟁으로까지 이어질 확률은 낮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앞으로 상당 기간 세계경제 질서가 혼란스러울 것은 분명하다. 특히 트럼프 취임 첫 100일간은 더욱 그럴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재협상뿐만 아니라 ‘기울어진 운동장’으로 트집 잡힐 수 있는 분야에 대한 대응책을 서둘러 마련해야 한다. 현재 정부가 한국개발연구원(KDI)과 함께 수출 지원 제도의 포괄적 점검에 나선 것은 시의적절한 일이다.

정부 내에 범부처 차원의 대외통상 담당 조직(예컨대 대통령 권한대행 직속 시한부 상설위원회)을 설치, 운용하는 것도 시급하다. 장관급 책임자를 중심으로 제조업뿐 아니라 금융·IT·법률·의료 등 각종 서비스와 투자 분야 관련 부처 정책담당자와 전문가들이 유기적으로 일할 수 있는 통상정책 기획조정 기구가 필요하다. 비단 미국과의 통상 관계뿐 아니라 한·일 FTA의 추진 등 시급한 일들을 일관성 있게 추진해야 한다. 그리고 중국과 미국 등 주요 교역 상대국의 부당한 보호무역주의적 조치는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하는 등 당당히 맞서야 한다.

사공일 본사 고문·전 재무부 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