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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보균 칼럼

말이 승부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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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박보균
박보균 기자 중앙일보
박보균 칼럼니스트·대기자

박보균
칼럼니스트·대기자

도널드 트럼프는 도발한다. 세상은 들끓는다. 그의 ‘반(反)이민 행정명령’은 기습이다. 역풍도 거세다. 그의 미국 대통령 취임 13일 동안 상황이다. 대통령 명령의 이유는 이슬람 테러범의 입국 방지다. 하지만 미국은 이민자의 나라다. 트럼프의 무기는 트위터다. 트위터에서 날리는 그의 직설은 거침없다. “사전 예고했다면 나쁜 놈들(bad dudes)이 벌써 들어왔을 것이다.”

반기문의 허망한 좌절은
‘언어의 근육’ 단련 못한 탓
정치 교체의 강렬한 열망을 
메시지로 격발 못 시켜
트럼프는 ‘말의 힘’으로 당선
오바마 인기는 언어의 조련

트럼프는 자칭 ‘140자(트위터 최다 글자 수) 헤밍웨이’다. 헤밍웨이 문체는 단문과 생략이다. 트럼프 언어는 간결하다. 리더십 역량은 복잡한 문제를 단순화하는 것이다. 트럼프의 어휘는 대체로 유치한 독설이다. 하지만 유치함은 우아함을 부순다. 트럼프는 길거리의 쉬운 언어를 동원한다. 워싱턴 정치의 기득권을 깨는 그의 방식이다.

트럼프의 대통령 취임사는 자극이다. “미국에 대한 살육(carnage)은 당장 여기서 멈춰야 한다”-. 그 낱말들은 뭉쳐져 지지자들의 기대에 영합한다. 그 표현으로 ‘미국 우선주의’는 전투적 어젠다로 실천된다. 주류 언론의 비판이 쏟아진다. “말로 당선된(elected on words) 트럼프…레토릭의 허세는 통치 현실과 충돌할 것이다.”(워싱턴포스트의 댄 발즈 칼럼) 하지만 트럼프는 거칠게 맞선다. “뉴욕타임스는 내가 프라이머리에서 질 것이라고 했고, 다음엔 선거에서 질 거라고 했다. ‘가짜(fake)뉴스’다.” 트럼프는 언어로 권력을 쥐었다. 주류언론은 트럼프 말의 위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말의 경쟁시대다.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은 “국가 간 경쟁에서 군사력, 정치력 그리고 문화력 중에서 언어의 힘, 언력(言力)이 중요한 시대”라고 했다. 전임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는 그것을 실감시킨다. 월스트리트저널 킴벌리 스트래슬의 칼럼은 인상적이다. "트럼프의 비밀병기는 오바마다. 선거 패배 원인이 오바마에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사람은 소수다.”

오바마에겐 역설이 작동됐다. 그의 퇴임 때 지지율(최대 60%)은 높다. 그것은 민주당 패배와 어긋난다. 기묘한 장면이다. 오바마의 언력이 만들었다. 이어령은 "오바마는 말의 힘을 창조적 수단으로 활용했다”고 진단한다. 오바마의 언어는 대중의 감수성을 흔든다. 역사의 전진에 동행하고 있다는 의식을 넣는다. 그의 고별연설은 강렬했다. “우리는 할 수 있다(Yes we can). 우리는 해냈다(Yes we did).” 그 말들로 오바마는 힐러리 낙선과 엮이지 않는다.

리더십은 ‘언어의 전선(戰線)’에 서 있어야 한다. 그곳이 소통의 창구다. 박근혜 대통령의 과거 평판은 선거의 여왕이다. “대전은요.” 간결함은 파괴력을 갖는다. 하지만 대통령이 된 뒤 언어 전선에서 철수했다. 그것은 치명적 실책이었다. 대통령은 민심과 격리됐다. 전선에 남은 지지자들은 허탈감에 젖었다. 최순실 게이트가 터졌다. 대통령의 지지기반은 이미 무너져 있었다. 정권의 추락은 급전직하였다.

유엔 총장 출신 반기문의 도전은 실패했다. 그는 귀국하면서 ‘정치 교체’를 내걸었다. 그 구호는 강렬했다. 우리 국회는 불신과 분노의 대상이다. 기성정치 혁파는 국민적 염원이다. 그는 국내 정치와 분리된 아웃사이더다. JP(김종필 전 총리)는 “국민들은 심장의 고동을 느끼게 해주는 정치 교체의 말을 갈망한다”고 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그의 메시지는 허술했다. 유권자의 열망을 격발시키지 못했다.

그는 언어의 근육을 먼저 단련해야 했다. 핵심은 정치 교체의 콘텐트 강화였다. 그것이 승부수였다. 하지만 그는 그 메시지를 조련하지 않았다. 그는 부지런히 다녔다. 팽목항도 가고 천안함도 찾았다. 겹치기 출연은 ‘정체(正體)성의 위기’로 이어졌다. 정치는 선택이다. 그 이후 연합이다. 여기에 치명적인 말실수가 겹쳤다. “돈이 없어 정당에 들어간다”는 식의 발언이다. 그것으로 그는 얕잡아 보였다. 지도자가 피해야 할 요소는 경멸이다.

반기문 캠프는 말의 상처를 방치했다. 그는 합종연횡 쪽으로 움직였다. 언어로 무장하지 않은 후보는 취약하다. 그런 상태에서 협상력은 부실하다. 제3지대 빅 텐트, 개헌론의 주도권은 떨어졌다. 김종인·손학규·박지원과의 만남은 그의 약세를 드러냈다. 지지율은 하락했다. 선두주자 문재인과의 격차는 벌어졌다. 정치는 소용돌이다. 곡절과 파란의 반복이다. 하지만 반기문의 반전 의지는 허약했다. 투지는 말로 생산된다. 그의 정치 드라마는 막을 내렸다. 입국 20일 만의 허망한 퇴장이다.

리더십의 메시지는 대중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말은 후보의 정체성과 신념을 드러낸다. 유권자는 지도자의 말 속에서 열광한다. 지도력은 언어로 다듬어진다. 반기문은 언어의 묘미를 깨닫지 못했다. 참모들은 대권행보의 수순(手順)을 잘못 짰다. 그 결말은 트럼프의 득세와 대조적이다. 오바마의 언어 연금술과 대비된다.

박보균 칼럼니스트·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