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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리포트] 트럼프, 여기 뉴욕에선 컬트무비 주인공이래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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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9면

인내심 잃어가는 월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25일(현지시간) 워싱턴의 국토안보부 본부를 방문해 국경 보안을 강화하는 내용의 반이민 행정명령에 사인하고 이 문서를 들어보이고 있다. [워싱턴 AP=뉴시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25일(현지시간) 워싱턴의 국토안보부 본부를 방문해 국경 보안을 강화하는 내용의 반이민 행정명령에 사인하고 이 문서를 들어보이고 있다. [워싱턴 AP=뉴시스]

“올 것이 왔다.”

“우리를 병들게 하는 욕망의 도니”
월가 맨들 “트럼프 해도 너무하군?
트럼프 랠리, 2만선 찍고 하락세
반이민법도 불거져 공포지수 쑥쑥

30일(현지시간) 뉴욕증권거래소에서 장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 객장 분위기는 숙연해졌다. 이날 아침부터 다우존스 산업지수가 맥없이 무너지다가 오후 들어 기력을 살짝 회복했지만 결국 전날에 비해 0.6% 빠진 1만9971.13을 기록했다. 지난 25일 다우지수가 사상 최초로 2만 포인트를 넘어섰을 때의 환호와 흥분은 더이상 찾을 수 없었다. 이날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 다우지수가 가장 많이 빠진 하루였다. 월가에서는 이를 두고 상식을 벗어나는 반이민법을 밀어붙이는 트럼프에 실망한 월가의 투자자들이 2만 포인트를 지탱하려는 명분을 잃었다고 분석했다.

MKM 파트너스의 톱애널리스트인 조나단 크린스키는 “2만 선이 무너질 수는 있지만 한 주의 장이 시작하는 월요일에 이처럼 떨어지면 그 여세가 계속 이어져 앞으로 좀더 가라앉을 수 있다”며 “특히 지난 40년간 2월은 항상 약세장을 기록했고, 특히 대선이 치러진 다음해 2월은 대체로 폭락하는 장이 많았다”고 말했다.

또 한 가지 내놓은 수치가 공포지수. 트럼프 대통령이 ‘마이 웨이(My way)’ 정책을 쏟아내면서 월가를 관통하는 공포지수가 2014년 이래 가장 안 좋은 수준이라고 했다. 이렇게 되면 투자자들이 공격적인 베팅을 꺼리게 마련이다. 가뜩이나 힘든 2월에 ‘트럼프노믹스’ 효과까지 겹쳐 증시가 랠리를 이어가기는 힘들다는 결론을 내렸다.

요즘 월가에서 유행하는 영화가 있다. 2001년 미국에서 제작·상영된 ‘도니 다코(Donnie Darko)’다. 전반적으로 공포스러운 컬트무비인데, 월가 증권맨들이 얘기하는 도니 다코는 바로 트럼프 대통령을 빗대는 말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 도니는 ‘욕망은 우리를 병들게 한다’는 교훈을 던져주는 인물이다.

사실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만 해도 월가의 최고경영자(CEO)들은 두 부류로 나뉘었다. 그의 공격적이면서 예측가능하지 않은 노선에 잘 맞춰서 비즈니스를 좋게 가져갈 것인지 고민하는 부류와, 금융규제법인 도드-프랭크 법을 무력화하고 세금 감면을 선언하는 모습에서 그의 진정한 열혈 팬으로 자처하는 부류가 또 하나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점점 트럼프노믹스의 효과를 의심하는 그룹이 많아지면서 ‘도니’를 떠올리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경제사슬의 가장 꼭대기에 위치한 국가가 자유무역을 적극 주장해왔다. 19세기 영국과 20세기 후반 미국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미국이 ‘아메리칸 퍼스트’를 외치며 보호무역으로 옷을 갈아입겠다고 선언한 것은 자신감을 잃은 것이라고 애널리스트들은 입을 모았다.

모건스탠리에서 미국 담당 최고 이코노미스트를 맡고 있는 엘렌 젠트너는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에 공장을 지으라고 글로벌 제조업체들에게 요구하지만 2008년 이후 제조업 숙련공들이 대거 빠져나간 지 오래여서 공장을 짓더라도 경쟁국의 생산성에 도달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며 “4년 임기 동안 제조업에 쏟아부은 열정의 열매가 익지도 않을 것이고, 또 빠르게 전개되지 않을 경우 인내심 없는 트럼프가 포기할까봐 더 우려된다”고 설명했다.

젠트너는 또 “만약 트럼프가 중국 환율을 문제삼으면서 압박을 세게 가할 경우 중국의 재정위기를 불러올 수 있다”며 “이렇게 되면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주변국들에도 피해를 주는 도미노 현상을 일으키는데, 이것이 우리 고객들이 가장 우려하는 시나리오”라고 강조했다. 그는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트럼프 행정명령의 효과를 지켜본 뒤 9월 이후 금리를 올릴 것으로 예상한다”고 덧붙였다. 트럼프가 달러 강세를 불편해 하는 측면도 일정부분 고려한 전망이다.

심재우 뉴욕 특파원

심재우
뉴욕 특파원

트럼프의 반이민 행정명령에 대해서는 ‘돈키호테식’이라고 입을 모은다. 미국 경제의 성장엔진은 애플·페이스북·구글이 맡고 있는데, 선입견과 편견으로 인재를 해외로 빼앗기면 그나마 갖고 있던 성장엔진의 동력이 줄어든다는 지적이다. 학생비자(H)까지 엄격히 간섭할 경우 세계각지의 정보기술(IT) 인재들은 좀더 편안한 곳으로 옮겨가게 되고, 결국 근본적인 위기를 겪게 된다는 것. 비즈니스 인사이더는 “보복관세와 교역량 감소로 그나마 남아있던 일자리까지 사라지면 미국경제는 내년에 경기침체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심재우 뉴욕 특파원 jwsh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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