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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대통령측 블랙리스트 옹호에 헌재 재판관 "인정하나?"

중앙일보

입력

블랙리스트를 인정하시는 겁니까?"

25일 박근혜 대통령 탄핵 심판 9차 변론이 열린 재판정에서 강일원 재판관이 박 대통령 대리인 송재원 변호사에게 한 질문이다.

송 변호사는 증인으로 출석한 유진룡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상대로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관해 질문을 하던 중이었다. 송 변호사가 블랙리스트가 필요하다는 듯 질문과 답변을 이어가자 강 재판관은 "피청구인이 블랙리스트를 인정하는 것인지 질문 취지가 이상하다"며 이같이 물었다.

이어 유 전 장관도 송 변호사에게 질문을 던졌다. "저도 궁금한데, (박 대통령이 블랙리스트를) 인정하시는 건가?"라고 물었다. 방청석에서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문화계 블랙리스트의 존재를 폭로한 유진룡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중앙포토]

문화계 블랙리스트의 존재를 폭로한 유진룡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중앙포토]

송 변호사는 "인정해서 물어보는 게 아니다"라고 했지만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 뒤에도 송 변호사의 질문 취지는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우리 국민들이 얼마 전에 국회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서 '블랙리스트가 있지 않지만, 정말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물어보는 것"이라고 했다.

유 전 장관의 답변은 송 변호사를 다시 당황케 만들었다. 유 전 장관은 "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밖에서는 그 일을 안했으면 직무유기 아니냐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다"며 송 변호사의 말에 공감하는 듯 입을 뗐다. 이어 "그렇다면, 왜 그 일을 주도한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은 자기가 그 일을 안 했다라고 하나? 그 일이 그렇게 정당한 일이면, 지금이라도 본인이 나서서 '나는 체제를 지키기 위해 이럴 수밖에 없었다'라고 얘기했어야 한다. 그런데 아무도 그런 얘기를 안 한다"고 말했다.

블랙리스트의 존재를 끝까지 모른다고 했던 김기춘 전 비서실장의 태도와 박 대통령 측 대리인의 블랙리스트에 대한 인식의 역설을 파고든 지적이었다. 방청석에서는 다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유 전 장관은 김기춘 전 실장이 블랙리스트를 주도했다고 진술했다. 2014년 7월 9일 퇴임을 앞두고 박 대통령을 독대해 블랙리스트를 멈춰 달라고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도 했다.

그가 대통령과 만난 자리에서 했던 '충언'은 이랬다.

"세월호 사건으로 국가가 굉장한 갈등과 위기 속에 빠진 상황에서 오히려 반대하는 사람을 끌어안고 포용해야 사회 갈등을 치유할 수 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내치면 나중에는 한줌도 아닌 사람만 대통령 편으로 남는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국가를 통치하려고 하나. 위험하다. 저한테 약속했던 것처럼, 반대했던 분들을 안아 달라."

유 전 장관의 걱정은 불과 1년여 만에 현실이 되고 있다.

유길용 기자 yu.gily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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