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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제5부 하원에서 발해까지…동양사 5천년의 베일을 벗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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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7월 하순 산동성 성도 제남시를 출발하여 산동성 2대 성지의 하나이며 중국을 대표하는 명산 태산으로 향했다.
태산은 『오악의 장』이라 일컬어진다. 오악이란 동악의 태산, 서악의 화산(섬서성 화음현), 북악의 항산(하북성 사양현), 중악의 숭산(하남성 등봉현) , 남악의 형산(호남성 상담현) 이다. 표고로 치면 태산은 오악중 제3위. 그 태산이 오악의 장으로서의 지위를 차지한 이유는 동쪽이라는 방위가 가지는 특수성이 그 하나.
증국에서는 예부터 동에는 봄과 만물을 생성하는 기운이 들어있다고 생각해 왔다. 또 한가지 더 중요한 이유는 역대황제가 봉선(천지에 제사지냄)의 의식을 거행해 내려온데 있다.
춘추시대 환공에게 봉사한 관중은 『태산에서 봉의 제례를 지내고 양부산(태산 남쪽50km)에서 선의 제례를 한 왕은 72가입니다』고 말했다. 태산은 고래로 명산이며 성산이었던 것이다.
『확고부동하기 태산같다』는 격언은 중국어로 『온여태산』이라 하는데 중국에는 그 밖에도 『태산북두』라는 말이 있어 우러러 볼만한 존재의 뜻이 있다. 각계의 최고봉에 위치하는 인물을 『태두』라 함도 여기서 유래됐다.
하늘을 날면서 보는 태산은 주변의 평지에서 불쑥 솟아 대지에 뿌리를 뻗고 있는 듯하다. 해발 1천5백45m의 태산에는 산 기슭에서 정상 가까운 남천문까지 6천7백여단의 돌계단이 이어져 있다. 진시황제봉선의식때 만들어진 것이 시초라 전해지고 있으나 적어도 당의 현종때도 돌계단이 있었다. 이백의 『유태산』이라는 장편시에 『어도』라 한 말은 현종황제의 길이며, 거기에 돌이 깔려있다고 나온다.
오랜 세월에 걸쳐 정비된 돌계단이지만 다리가 튼튼한 사람이 짐을 지지 않고 올라도 반나절은 걸린다.
산기슭에서 태산의 허리춤에 해당하는 중천문까지는 포장도로로 차로는 약 20분 걸리는 거리. 중천문에서 남천문까지는 케이블카가 다닌다. 길이 2천7백m, 8분소요. 남천문에 이르면 정상까지는 1km. 남천문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아도 안개 때문에 길게 이어져 있어야 할 돌계단이 보이지 않는다.
산기슭의 기온은 섭씨33도인데 여기서는 18도이며 체감온도는 더 낮다. 안개속을 뚫고 아래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이 세차다.
남천문에서 정상을 향해 올라가자 이윽고 이 고장사람들이 『천가』라 부르는 상점과 여관이 늘어선 곳에 이른다.
그곳을 지나자 여기 저기에 자연석에 새긴 비석이 보인다. 대부분이 고대부터 현대까지 태산에 오른 명사들이 감흥을 새긴 것. 안개는 점점 짙어진다. 남천문에서 걸어 약4O분만에 겨우 정상에 도착했다. 정상은 옥황정이라 불린다. 돌벽으로 둘러친 옥황전이 서있고 도교의신인 옥황대제가 봉안되어 있다. 그러나 원래는 하늘에 제사지내던 곳이었고 역대황제가 봉선의식을 거행하던 곳이다.
진시황이 서기전219년, 제위에 올라 봉선의식을 거행했다. 이때의 「거도」가 현재의 돌계단의 시초였는지도 모른다. 정상의 옥황전 문밖에 높이6m, 너비1.2m, 두께0.9m의 글씨가 새겨지지 않은 무자비가 있다. 곽말고에 의하면 한무제가 세운 것으로 글씨가 없는 것은 당시 무제의 마음에 드는 문장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무제는 장안에서 일곱번 태산에 올라 봉선의 의식을 거행했다.
강적 흉노와의 싸움에서 거둔 승리와 자신의 불로강수를 기원했다 한다. 당 현종의 봉선때는 페르시아·천축·신라·왜국등의 사절이 참가했다. 청의 건륭제는 역대황제 중에서 가장 많은 11회나 올랐다.
취재팀은 옥황전 바로 가까이 있는 대정빈관에 숙박했다. 1977년에 건축한 것으로서 2백명 가까이 들 수 있다. 이튿날 새벽4시반에 일어나 일출을 촬영하기로 했다. 춥다. 두꺼운 겨울용 코트차림으로 떠났다. 숙소에서 3, 4분 거리에 일출을 바라보는 명소가 있다.
공북석이라 하는 길이 약6m의 바위가 공중에 비스듬히 돌출해 있는 것. 짙은 구름이 하늘을 가리고 있어 촬영이 어려웠다.
옥황전 바로 아래폭에 있는 도교사원 벽하원군사는 송의 진종때 창건하여 명·청때 증수된 뒤에 규모가 커졌다. 벽하원군사옆에 자연암벽을 깍아 만든 비석이 늘어서 있다.
가장 유명한 것은 현종황제의 봉선때 세운 『기태산명비』. 높이 13.3m, 너비 5.3m다. 거대한 비에는 9백96자가 새겨겨있다. 문자가 모두 당시부터 금박이었는데 1983년에 다시 칠했다. 두모궁에서 동북으로 약1km의 산중에는 『금강반고파나밀경』을 새긴 거대한 자연석이 서있다. 글자 하나의 크기는 50cm 사방, 원래는 2천5백자쯤이었는데 현재 남은것은 1천43자.
케이블카로 오른 중천문에서 남천문 사이를 돌계단을 따라 내려가면서 촬영과 취재를 시도한다. 물건을 운반해 올리는 전문 짐꾼이 많은 것을 보고 놀란다. 3백명쯤이나 된다고 한다. 양폭 어깨에 걸친 긴 멜대 양쪽 끝에 매단것은 쌀부대·맥주·벽돌·재목 등등 가지가지.
남천문과 중천문 거의 중간쯤에 오대부송이란 소나무가 있다. 시황제가 봉선의식때 폭풍우를 만나 그것을 피했던 소나무. 시황제는 소나무에 감사하는 뜻으로 오대부 벼슬을 준데서 그 이름이 유래한다.
이것은 사마천의 『사기』에 쓰여있는 고사다. 그러나 이 사실은 나중에 비난거리가 된다.
시황제의 봉선뒤에 불과 12년만에 진은 멸망한다 .재위중에 유명한 『분서갱유』를 저질렀고 봉선 때 유자를 물리친 일 등으로 말미암아 시황제는 유자의 원한을 샀다. 시황제가 폭풍우를 소나무 밑에서 피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유자는 『시황은 태산에 올랐을 때 폭풍우를 만나 봉선을 못했다』고 말을 퍼뜨렸다는 것이다.
남천문에서 중천문까지는 2.7km라 한다. 아침 9시에 출발하여 하오 1시30분까지 4시간반이 걸렸다. 올라갈 때는 케이블카로 불과 8분이 걸렸었다. 도중에 인터뷰등 취재를 하면서 내려왔다해도 예상보다 시간과 힘을 무척 소비한 것이다.
도중에 만난 일반 사람들은 벽하원군사를 목표로하고 온듯한 노파등과 관광목적으로 오르는 사람이 많다. 상해에서 왔다는 젊은 여성도 『일생에 단 한번의 기념』이라고 말하면서 올라간다.
태산 남쪽기슭의 태안현성안에 대묘가 있다. 여기는 『동악태산신』이 봉안되어 역대황제가 봉선때 대전을 거행하기도하고 숙박도 한 곳이다. 대묘는 북경의 자금성, 곡부의 공자묘와 아울러 중국 삼대궁전의 하나로 친다. 부지의 넓이는 9천6백4O평방m.
대묘는 『우각의 성』이라 불릴만큼 비석이 많다. 그중에도 유명한 것이 진의 제2대 황제 호해의 조서를 새긴 『진이세태산우각』, 그리고 한대 중앙아시아의 대월씨국에 간 사자로 실크로드 개척자라 불리는 장건의 석비등이다.
이러한 대묘의 중심이 천기전. 천기전은 벽하원군사와 거의 같은 시기 북송대중상부2년(1009년)에 지어졌다. 『송사』에 의하면 북송황제진종이 봉선했을 때 지어졌기 때문에 천기(천자의 하사)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동서48.7m, 남북19.8m, 높이22.3m의 당당한 건물이다. 지붕은 유리황기와로 이어졌다.
천기전의 내벽에는 대벽화가 있다. 벽화는 태산신의 순행을 그린 송시대의 것이다.
증심인 태산신의 동악대제는 네 바퀴에 여섯마리의 말이 끄는 수레를 타고 있다. 사자 두마리가 등에 보병을 지고 흰 코끼리를 탄 사람이 든 보병에서는 오채의 빛이 나고 있다. 그밖에 낙타·기린·호위 문무관·의장대·기마군악대 등이 수행하고 있다. 6백72명의 인물이 그려진 장대한 출행도였다.
하오9시 촬영을끝내고 숙소로 돌아오니 갑자기 강한 바람을 동반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번개가 번뜩이고 천둥소리가 요란하다. 그때마다 태산의 능선이 어둠속에 순간적으로 뚜렷이 떠오른다. 시황제가 오대부송 밑에서 비를 피했다는 고사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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