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장례도 맘대로 못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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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28일 새벽4시 거제 대우병원 유가족대기실-. 사망 근로자 이석규씨(21)장례식을 3시간 앞두고 기자회견을 요청한 유가족 대표 이청수씨 (39·이씨의 삼촌)가 비장한 표정으로 노조측의 장지 번복을 비난했다.
『3자(유족·노조·회사)합의 준수하라. 석규를 어머니의 품으로 돌려달라. 소박한 근로자들을 선동하는 운동권 개입을 즉각 중지하라. 앞으로의 불상사는 전적으로 대우노조 장례위원장에게 책임이 있다.』
이씨의 목소리는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그러나 천근의 무게를 갖고 듣는 사람들의 가슴을 눌렀다. 유족·노조·회사가『어떤 일이 있어도 석규는 남원으로 데려가 내 품안에 두겠다』는 어머니의 애절한 절규를 따르기로 결정한뒤, 그것도 발인을 6시간 앞두고 노조집행부가「합의」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장지를 번복하자 유족들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유족측은『노조측이 27일의 3자합의를 스스로 어겼고 인륜과 도덕을 무시한 처사로밖에 볼수 없다』며『남원으로 가지않으면 영구차를 타지 않겠다』고 버텼다.
이씨의 장지는 22일 사망직후 가족들의 뜻에 따라 남원 선산으로 정해졌으나 국민운동본부등 재야세력과 이들의 「입김」을 받은 노조측이 개입하면서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묘지와 광주 망월동이 제기돼 혼선을 빚었다.『열사아들 원치 않는다. 내자식 장례도 마음대로 치르지 못하느냐』는 노모의 절규와 따가운 여론의 화살이 장지를 남원으로 결정토록했다.
그러나 여론과 현지 분위기에 밀려 물러나 있던 재야측이 다시 장례식 전날인 27일 하오부터 이미 합의결정된 이씨의 보상및 구속근로자 석방을 들고 나오면서 일부 근로자들은 유족을 향해『이석규는 당신들의 자식이 아니라 1천만 근로자의 자식이며 광주 망월동에 묻어야한다』고 반발, 장지를 바꿨다.
결국 노사간의 극적 타결이나 3자합의는 휴지가 되고말았다.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근로자들은『엄연히 합의해놓고, 그것도 다른 일이 아닌 장례식을 이렇게 난장판으로 만들수 있느냐』며『정치투쟁도 좋지만 인륜과 도덕을 어길수는 없는 법』이라며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길진현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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