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내 기타는 잠들지 않는다 16. 음반작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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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애드훠의 TV 공개방송 장면. 애드훠는 전국 순회공연 등의 활동을 활발히 펼쳤으나 결과는 필자(맨 왼쪽)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애드 훠 음반이 신중현의 공식 첫 앨범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실은 1958년에 첫 음반을 낸 경험이 있다. 우리 나라 동요곡을 기타 솔로로 연주한 음반이었다. 신중현이 아닌 '히키 신'이란 이름을 달았다. 당시 '미 8군에서 유명한 꼬마 기타리스트'로 이름이 난 상태라 제작자도 환영했다. 아직까지 자신이 히키 신의 팬이었다는 얘기를 들을 기회가 있어 가슴이 뿌듯하다.

녹음은 우리 나라 최초의 녹음실인 '장충녹음실'에서 진행됐다. 장충동의 마당이 넓은 커다란 가정집이었다. 당시엔 몰랐지만 장충동은 부유층이 살던 동네라고 한다. 나중에 연예인 대마초 사건으로 구치소에 있던 시절, 대도 조세형과 함께 방을 쓸 기회가 있었다. 그에게 지겨울 정도로 도둑질 이야기를 들었다. 장충동이 부자 동네라 큰 도둑들의 주요 타겟이었다는 사실도 그때 알았다.

하지만 말이 녹음실이지 별다른 특별한 시설이 없었다. 카펫을 깐 응접실에서 녹음을 하는 것이었다. 녹음기라곤 미군들이 군용으로 쓰던 릴 테이프 레코더가 전부였다. 마이크를 단 하나 밖에 꽂을 수 없는 모노 타입이었다. 전선을 최대한 늘어뜨려 마이크를 방 가운데 세우면 멤버들이 빙 둘러서서 거기다 대고 녹음을 했다. 요즘처럼 조각 조각 나눠 녹음하고 기계로 수정도 하는 방식은 그 당시 상상도 못했다. 연주하다 틀리면 레코드의 처음부터 다시 녹음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 몇 곡에 달하는 녹음은 단 한번 만에 끝났다. 아침 10시에 시작해 오후 4~5시면 앨범 하나를 녹음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걸 어떻게 했나 싶다. 하지만 그 시절의 음악은 지금 들어도 손색 없다. 음악이 살아 있기 때문일까. 모든 신경을 곤두세워 초능력을 발휘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나는 아직도 음악은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본격적인 음반 작업은 1963년 애드 훠 멤버를 구성하면서 시작됐다. 김대환(드럼) 등 미 8군 출신으로 구성했다. 미 8군에서 활동하는 음악인은 손바닥 보듯 훤하게 알고 있었다. 멤버 구성은 쉬웠다. 그리고 음악 작업에 전념하기 위해 8군 무대에서 물러났다.

먹고는 살아야겠기에 동두천 미 7사단 근처에 방을 얻었다. 멤버들도 몽땅 끌고 가 함께 살았다. 밤에는 7사단에서 '야매(비공식)쇼'를 하고 낮에는 작곡과 연습을 했다. 야매쇼는 연예회사나 미 8군을 거치지 않고 클럽과 직거래를 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이리 저리 떼이는 수수료가 없어 벌이도 괜찮았다. 당시 동두천은 서울에서 비포장도로를 타고 한참 가야 나오는 시골이었다. 그러다보니 불법 쇼를 하더라도 아무도 건드릴 사람이 없었다. 음악 작업을 방해할 요소도 없었다.

그러나 막상 음반을 만들기 직전 멤버들 간에 문제가 생겼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대로 끌고 가기는 힘든 상황이었다. 해산하고 서울로 다시 나왔다. 권순근(드럼).한영현(베이스).서정길(보컬) 등 새 멤버를 모아 팀을 재결성했다. 그리고 음반을 냈다. 음반사에서 순순히 판은 내줬지만 계약금 따위는 줄 생각도 하지 않았다. 가수나 연주자들은 음반을 내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하던 시절이었다. 동두천서 연습하던 과정에서 쌓은 노하우를 최대한 활용해 작업도 일사천리로 이뤄졌다.

신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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