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매거진M] 숨 막히게, 자비에 돌란… '단지 세상의 끝'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에게 첫눈에 반했던 캐나다 퀘벡의 무명 아역 배우. ‘타이타닉’(1997, 제임스 캐머런 감독) ‘쥬만지’(1995, 조 존스턴 감독) 같은 영화를 보고 자란 할리우드 키드. 그리고 칸국제영화제(이하 칸영화제)가 사랑하는 작가주의 감독이자, 명품 브랜드 ‘루이뷔통’ 광고와 패션 잡지 커버를 장식하는 ‘힙스터’의 아이돌. 세계적 스타 감독 자비에 돌란(27)의 드라마틱한 삶의 궤적이다. “나답지 않은 영화에는 관심도 없다”는 그의 입버릇처럼, 틀에 박히지 않은 ‘자비에 돌란다움’이 지금의 돌란을 있게 했다. 지난해 제69회 칸영화제에서 ‘단지 세상의 끝’(원제 Juste La Fin Du Monde, 1월 19일 개봉)을 둘러싼 혹평에 대해 그가 조금도 개의치 않았던 이유다. 프랑스 작가의 동명 희곡을 토대로 한 이 여섯 번째 장편영화는 돌란이 처음으로 캐나다를 벗어나 프랑스 배우들과 함께한 작품. 거센 비판에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으며 “‘단지 세상의 끝’은 내가 연출한 최고의 영화”라고 응수했다. 그리고 ‘단지 세상의 끝’은 보란 듯이 칸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2등상)과 애큐메니컬상(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이 돋보이는 영화에 수여하는 상)을 차지했다. 오는 2월 열리는 제89회 아카데미 시상식 외국어영화상 부문에도 캐나다를 대표해 이름을 올렸다. 어쩌면 세간의 주장대로 돌란은 ‘과대평가된 천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건, 그의 영화가 어떤 관객에게는 심장이 얼얼할 만큼의 감정을 체험하게 해 준다는 사실이다. ‘단지 세상의 끝’도 그중 하나다. 누군가의 죽음을 앞두고 12년 만에 재회한 어느 가족. 용광로처럼 들끓는 그들의 애증 어린 마음이 눈빛에 담겨 숨 막히게 교차한다.

돌란이 ‘단지 세상의 끝’의 원작 희곡을 알게 된 건 2009년이었다. 연출 데뷔작이자 자전적인 퀴어영화 ‘아이 킬드 마이 마더’(2009)를 막 완성했을 무렵, 앤 도벌이 대본 하나를 건넸다. 참고로, 도벌은 돌란의 영화 속 모성상을 대변하는 배우다. 돌란이 주연을 겸한 ‘아이 킬드 마이 마더’에서 그와 징글맞은 모자(母子) 사이로 호흡을 맞춘 뒤, ‘하트비트’(2010)에서는 극 중 돌란이 연기한 프랑시스가 사랑하는 동성 친구의 성공한 엄마, ‘마미’(2014)에서는 심신이 불안정한 아들을 감당할 수 없어 허덕이는 엄마 역으로 출연했다. “꼭 읽어 봐야 할 작품이야.” 도벌이 쥐어 준 건, 10년 전 그가 공연한 연극 ‘단지 세상의 끝’ 대본. 이제 클래식 반열에 든 프랑스 동성애자 작가 장 뤼크 라가르스(1957~1995)가 에이즈로 죽기 전에 남긴 자전적 가족 드라마다. 돌란은 그걸 받자마자 서재에 내팽개치곤 그대로 잊어버렸다. 당시 기억에 따르면, 이 작품에 괜한 “반감이 일었다”고.

대본을 다시 꺼내든 건 5년 뒤. ‘마미’로 제67회 칸영화제에 다녀왔을 때였다. 칸에서 그는 평소 “좋아한다”고 공공연히 얘기해 온 배우 마리옹 코티아르를 만났다. ‘로렌스 애니웨이’(2012)에서 여자가 되고 싶은 남자 로렌스(멜빌 푸포)의 어머니로 분한 나탈리 베이와도 다시 작업하고 싶었다. ‘베이와 코티아르를 함께 출연시킬 작품이 없을까’ 궁리하던 중 떠오른 이야기가 ‘단지 세상의 끝’이었다. 돌란은 말한다. “불과 5년 사이 어른이 된 걸까. 라가르스가 그리는 등장인물의 말과 그 이면의 감정·침묵·망설임·불안을 이해했다. 강렬할 정도로 사실적인 그들의 결점과 불완전성에 이끌렸다. 진정성 있고 사람 냄새가 났다. 이 모든 게 (내가 늘 영화에서 다뤄 온) ‘가족’이라는 주제와 맞닿아 있었다. 언제나처럼, 도벌이 옳았다.”

경험하지 못한 가족 관계로의 탐험

‘단지 세상의 끝’은 돌란에게 작품 세계를 확장하는 도전이기도 했다. 그가 이전까지 그려 온 단순한 모자 관계에서 졸업해, 처음으로 “좀 더 어른스러운 긴장 관계”로 돌입했다. 그는 “직접 탐험하지 못한 ‘고통’을 다루는 것 자체가 (감독이자 작가로서) 나를 풍요롭게 했다”고 말한다. 라가르스가 원작에 심어 놓은 형수와 처남, 남매의 미묘한 긴장감이 탄탄한 뼈대가 됐다.

이 영화는 시한부 선고를 받은 젊은 작가 루이(가스파르 울리엘)가 12년 만에 가족과 재회하는 어느 오후를 그린다. 루이는 자신이 죽어 간다는 사실보다 가족을 다시 만날 부담감에 더 사로잡혀 있는 것처럼 보인다. ‘별것 아니야’라고 애써 되뇌는 그의 초조한 마음은 영화 제목에도 담겨 있다. 원제 ‘Juste La Fin Du Monde’는 불어로, ‘그렇다고 세상 안 끝나’ ‘그래봤자 세상 끝이지, 뭐’라는 역설적 의미를 담은 중의적 표현이다. 루이의 가족도 어색하긴 마찬가지다. 루이를 처음 만나는 온화한 성품의 형수 카트린(마리옹 코티아르)만 제외하고 말이다. 형 앙투안(뱅상 카셀)의 심경은 훨씬 복잡하다. 오래전 그는 자신과 터울이 큰 루이를 귀여워했다. 추억이 많은 만큼 오랫동안 가족을 외면했던 동생에 대한 원망도 크다. 공구 공장에서 일하는 그는 동성애자 지식인이자, 어머니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동생에게 분노와 열등감까지 품고 있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이 영화에 폭탄은 두 개다. 입술을 뗄 때마다 죽음을 알릴 수 있는 루이와 누가 봐도 폭발할 것 같은 앙투안 말이다.

침묵의 미장센

‘단지 세상의 끝’ 한글 자막을 작업한 황석희 번역가는 이 영화의 영어 자막이 “불어 원문에 비해 더 건조하고 정보가 비어 있음을 느꼈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거친 대사는 어느 정도 돌란의 의도였다. 그는 ‘단지 세상의 끝’의 시나리오 각색과 영어 자막 작업까지 직접 도맡았다. “원작자 라가르스의 문체가 감정의 그릇”이라 생각한 돌란은 “라가르스의 대사를 타협 없이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라가르스는 일부러 문법을 틀리거나 같은 내용을 다시 고쳐 말한다. 이러한 극 중 화법이 나약하고 가끔은 추한 인물들에게 인간적 숨결을 불어넣었다. 그 말투를 바꾸면, 가족에 관한 진부한 드라마가 되어 버릴 것 같았다.”

상대를 질식시킬 듯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루이와 가족 간의 기나긴 대사들은 원작을 대부분 살렸다. 원작에서 상당 비중을 차지했던 루이의 독백에 담긴 진심들은, 각 장면의 분위기를 살려 인물 간에 주고받는 시선의 클로즈업으로 부각시켰다. “클로즈업으로 장면의 핵심에 더 다가감으로써 관객이 인물들과 심리적으로 가까워지기를 바랐다”고 돌란은 말했다. 루이가 죽은 연인을 추억하는 회상 장면이나 유년 시절에 살던 집을 보고 싶어 하는 설정 등은 돌란이 새롭게 새긴 자신의 인장이다. “유년기의 집은 내게 중요한 화두다. 우리가 후회하는 과거이자, 우리가 항상 후회하는 과거니까.” 돌란의 말이다.

차기작은 할리우드에서

극 중에서 루이가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은, 고작 3시간. 하루 만에 촬영한 듯 보이지만 실제 촬영은 20일 걸렸다. 모든 배우가 모인 날은 엿새 정도다. 사전에 돌란이 각 배우들과 따로 리허설을 했다. 코티아르는 촬영 현장에서 즉흥적 변화를 즐기는 돌란 덕에 “마치 ‘라이브 아트’를 만드는 기분이었다”고 했다.

‘단지 세상의 끝’을 마무리 짓고 지난해 차기작에 돌입한 돌란. 제시카 차스테인·키트 해링턴·나탈리 포트먼 등 할리우드 톱배우들이 함께하는 첫 영어 영화 ‘존 F 도노반의 죽음과 삶’ 촬영에 한창이다. 소년과 편지를 주고받게 된 할리우드 스타의 이야기다. ‘LA 타임스’에 따르면, 그는 새로운 시나리오도 쓰기 시작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그리는 작품으로 “남성들의 타고난 폭력성이 우리 삶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그릴 예정이다. 그동안 영화에서 아버지의 존재를 명쾌하게 드러내지 않은 돌란의 어떤 변화다. 그 변화를 가늠할 만한 단초가 바로 ‘단지 세상의 끝’이다. 이 영화를 놓쳐서는 안 되는 이유다.

임혜경 번역가가 들려주는 원작 희곡

장 뤼크 라가르스(사진)는 프랑스에서 가장 많이 공연되는 희곡을 쓴 현대 극작가 중 한 사람이다. 희곡집 『단지 세상의 끝』을 국내에 번역한 숙명여자대학교 프랑스언어·문화학과 임혜경 교수는, 그를 “새로운 언어를 찾아, 무의미 속 의미를 탐색한 작가”라 소개한다. ‘단지 세상의 끝’은 그런 라가르스가 세 번 다시 쓴 작품이다. 자신이 에이즈에 걸렸음을 알게 된 1988년 ‘안녕’이란 제목의 희곡을 썼다가, ‘잠시 갬’이란 제목으로 고쳤다. 1990년 6개월간 독일 베를린에 체류하며 이를 수정해, 비로소 ‘단지 세상의 끝’을 완성했다. 죽기 1년 전부터 등장인물을 늘려 규모를 키운 작품이 1995년 발표한 유고작 ‘먼 나라’다. ‘단지 세상의 끝’에서 루이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 같은 말을 자꾸 고쳐 말했던 가족처럼, 라가르스 스스로도 죽음 앞에 자신의 마지막 이야기를 더 정확한 언어로 고쳐 쓴 셈. 라가르스는 1995년 9월 30일 연극 연습을 하다 3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글=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사진=엣나인필름

자비에돌란 기사 Click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