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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너리티의 소리] 國籍포기서 쓰는 일제강점 피해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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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광복절이 다가온다. 민족이 빛을 되찾은 날이다. 하지만 우리 주위에는 아직도 깜깜한 어둠 속에서 한의 세월을 보내고 있는 일제강점하 피해자들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199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일본 법정을 중심으로 가해자인 일본 정부와 일본 기업을 상대로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며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이러한 법정 투쟁 중에는 원폭피해자인 곽귀훈씨처럼 지난해 12월 최종 승소 확정된 예외적인 경우도 있으나 일부의 화해 이외에는 대부분 패소하고 있다.

피해자가 가해자의 법정에서 싸우는 것이 불리하다고 하여 미국과 한국 법정에서도 피해자들은 얼마 남지 않은 여명을 걸고 마지막 힘겨운 투쟁을 하고 있다.

그런데 패소판결의 흐름을 보면 그 이유가 최근 달라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전에는 주로 국가무책임 이론, 시효나 제척 기간, 별개 회사론 등에 의해 기각당했지만 최근에는 65년 한.일 청구권협정에 의해 기각당하고 있다.

그래서 피해자들은 한.일 청구권협정에 의해 자신들의 권리가 소멸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 한국 정부를 상대로 당시 협정 관련문서를 공개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이를 거절했다. 이에 따라 정보공개 소송이 현재 서울행정법원에서 진행 중이다.

북.일 간 국교정상화 과정에서 일본 측은 한.일협정 방식을 모델로 하고 있는데 한.일 청구권협정 관련 문서를 공개하면 협상에 임하는 일본 측에 결정적으로 불리한 자료가 되므로 이를 공개하지 못한다는 것이 우리 정부의 입장이라고 한다.

법치국가에서 피해자가 누구를 상대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해야 하는지 모호하게 하는 것은 그 자체가 중대한 인권침해다. 한.일 청구권협정에 의해 일제강점기 피해자들의 권리가 모두 소멸되었다면 한국 정부는 이들의 권리를 빼앗은 가해자가 된다.

외교적 보호의 포기에 의해 자국민을 방치한 잘못 이외에 권리를 빼앗았고 나아가 그 빼앗은 진상마저 은폐하는 삼중의 가해를 한국 정부가 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우리 정부의 태도에 대해 일제강점기 피해자들은 분노하고 있고 이러한 분노가 결국 국적포기서를 제출하는 움직임으로 나아가고 있다.

일제강점기 피해자들은 오는 13일 청와대에 국적포기서를 개인적으로 제출한다고 한다. 이에 대해 우리 정부는 아무런 반응이 없다. 단지 우리 현행법상 국적 포기가 불가능하다는 이유만으로 이러한 피해자들의 움직임을 무시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나라 없는 설움을 온몸으로 겪고 국적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피해자들이 왜 이런 결정을 했는지 그 이유를 알려고도 하지 않고, 현행 국적법을 들먹이며 이들의 절규를 외면하는 우리 정부의 태도를 보면서 '국민이 대통령'이라는 슬로건을 걸고 있는 우리 참여정부의 국정철학은 어디 갔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오는 광복절 이전에 노무현 대통령은 할 일이 있다. 즉각 일제강점하 피해자들의 대표를 만나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해방이 된 지 58년이 되는 현재까지 어느 대통령도 일제강점기 피해자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

그러기에 이들은 대한민국이 단 한번도 자신들에게 따뜻하게 해준 적이 없었다고 한의 절규를 하는 것이다. 일본유족회 회장은 청와대에서 만나면서 한국인 유족들의 면담 요구는 거절하는 우리 대통령들을 보고 우리 피해자들이 어떤 생각을 해왔을지 盧대통령은 잘 생각해 보기 바란다.

대통령이 아무런 준비도 없이 피해자들을 만날 수 있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대통령이 일제강점하 피해자 문제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피해자들은 어둠과 한의 세월 속에서 빛을 되찾을 희망을 가질 수 있다. 盧대통령의 결단을 촉구한다.

최봉태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