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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 속의 마지노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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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올더스 헉슬리의 수필에 나오는 얘기다. 저급한 예술이 참을 수 없어 자살한 청년의 이야기. 헉슬리가 말동무하는 것을 즐길 정도로 지적이고 매력적인 사람에 관한 이야기. 그런데 세상 취향을 뛰어넘고 싶었던 그에게 세상에는 너무 저속하지 않은 것이 거의 없었고 그를 미적으로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을 찾기는 불가능했다. 셰익스피어의 글은 저질이고, 고야는 그림이 너무 단조롭고, 모차르트의 음악도 조잡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아마도 헉슬리처럼 교양 있고 친절한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그의 죽음이 큰 동정을 받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미학적인 불만족 때문에, 그것도 섣부른 취향 때문에 자살했다니 황당한 얘기랄밖에.

그런데도 난 그의 이야기를 떠올릴 때마다 실실 웃음이 나오며 위안 같은 걸 얻는다. 내 괴팍스러움 때문에 사는 게 힘들어질 때마다 '맘에 드는 예술이 없다고 자살한 사람도 있는데 뭐'라고 생각하면 나 자신이 마구 용서가 되는 것이다. 게다가 그의 '견딜 수 없어 함'의 정도는 너무 극단적이어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행동 중에서도 상당히 특이함은 물론 숭고하다는 생각까지 드는 것이었다.

결벽증이 병인 이유는 타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 봐가며 상황 봐가며 녹록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남에게 폐를 끼치고 자신도 고통스럽다. 나는 이제까지 임상적 의미에서 결벽증 환자는 만난 적이 없지만, 내가 만난 사람 모두 적어도 하나씩은 결벽증적인 습성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어떤 사람은 하루에 반드시 샤워를 두 번씩 하는, 경미하나 고전적인 결벽증세를 갖고 있고 어떤 사람은 방을 잔뜩 어질러 놓고 그걸 누구도 치우지 못하게 하는 괴벽이 있다. 어떤 사람은 청바지까지 꼭 다려 입고, 어떤 사람은 빳빳한 옷은 견딜 수 없어 한다. 이런 습성들은 사소하지만 저마다 신성불가침의 지역이란 생각도 든다. 어떤 상황에서도, 누구에게도 내주지 않는 마지노선 너머의 공간. 남에게 절대 뺏기지 않는다면 더 이상 사소하지 않다.

나이가 들면서, 사회생활에 적응하면서 이런 결벽증들을 희생해야 할 때가 있다. 어떤 사람에게 있던 결벽증이 줄거나 없어진 걸 보면 괜스레 서운해질 때가 있다. 그러고 보면 세균이든 타인의 체온이든 견딜 수 없어 하는 결벽증도 병이지만, 뭐든 견디는 것도 병이 아닐까. 살다 보면 못생긴 남자와 김치찌개를 함께 떠먹는 일도 견뎌야 하고, 집 장수 취향대로 만든 쪽마루를 밟고 사는 고초도 견뎌야 한다. 이것도 견디고 저것도 견디다 보니 견뎌서는 안 되는 것조차 견디게 된다. 저마다 갖고 있는 약간의 결벽증을 지켜 나가는 훈련, 그것도 모이면 개인을 위해서나 사회를 위해서나 일종의 힘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본다.

◆약력=연세대 심리학과 및 대학원 졸업, 저서 '뉴요커', 화가 및 작가

박상미 화가

*** 바로잡습니다

1월 18일자 30면 삶과 문화 '내 마음 속의 마지노선'의 필자 박상미 화가의 약력 중 '이화여대 동양화과' 졸업이란 부분은 '연세대 심리학과'의 잘못이기에 바로잡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