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내 기타는 잠들지 않는다 12. 첫 기타 독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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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1960년대 미 8군 무대에서 공연하는 필자(맨 왼쪽). 데뷔 초반엔 부끄러움을 탔지만 무대에 자주 서면서 쇼맨십도 늘었다.

궁리 끝에 통역을 맡은 매니저에게 부탁했다.

"미군들이 자꾸 기타 솔로를 요청하는데…. 뭘 연주하면 좋을지 미국 사람들에게 좀 물어봐 주십시오."

매니저는 나를 클럽 책임자에게 데려갔다. 그러더니 영어로 뭐라고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클럽 책임자는 커다란 열쇠 꾸러미를 들고 앞장섰다. 쥬크박스를 열었다. 몇 십 센트를 넣으면 곡이 연주되는 쥬크박스는 클럽마다 하나씩 있었다. 쥬크박스에는 속칭 '도너츠판(레코드 하나에 한 곡이 담긴 45회전판)'이 잔뜩 꽂혀 있었다. 그는 그 중 네 장을 골라 줬다. "생큐"라고 인사하고 받았다.

창고로 돌아와 전축에 레코드판을 얹었다. 기타 솔로가 죽여줬다. 버추스(Virtues)의 '기타 부기 서플(Guitar Boogie Shuffle)'이었다. 당시 미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던 기타 솔로 곡이었다.

잠도 안 자고 곡을 완전히 습득했다. 그런데 반주가 받쳐주지 않으면 솔로 독주는 불가능했다. 막내 주제에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가수들도 자기 노래 한번 부르려면 밴드 마스터에게 돈을 쥐어 줘야 하는 시절이었다. 용기를 내 밴드 마스터에게 말했다.

"어제 클럽 책임자에게 받은 곡인데 오늘 연주하고 싶습니다."

"어제 받았는데 어떻게 오늘 할 수 있나?"

"밤새 연습했습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펜을 들고 반주 악보를 만들기 시작했다. 편곡은 이날 공연이 시작되기 직전에야 겨우 끝났다.

용산역 앞의 에어멘스 클럽. 그 곳에 오는 미군들은 평소에도 사복을 입는 정보 부대원들이었다. 군복 입은 군인만 상대하다 미국 상류층 연회장처럼 화려한 모습을 보니 위압감을 느꼈다. 온 신경이 곤두섰다.

"여기서 틀리면 끝장인데…" 걱정이 대단했다.

몇 곡이 지나고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아무 생각이 없었다. 무조건 죽어라 연주했다. 내가 뭘 했고 어떻게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연주가 끝났다. 의자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인 채 넋을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옆 자리에서 콘트라베이스를 연주하던 선배가 발로 내 다리를 툭툭 찼다.

"왜 그래요?"

"일어나."

"왜요?"

"앞을 봐."

미군들이 기립 박수를 치고 있었다. 난 그 소리도 못 들었던 게다.

"야, 일어나서 인사해."

첫 기타 솔로에 기립 박수를 받은 것이다. 그 이상의 영광은 없었다. 미 8군 입성 3개월 만이었다.

이튿날 월급이 3000원에서 7000원으로 뛰었다. 입이 찢어졌다. 일주일 뒤 어떤 사람이 오더니 물었다.

"자네 여기서 얼마 받나?"

그는 1만5000원을 줄 테니 자기 밴드로 오라고 했다. 나는 "고맙습니다"라며 꾸벅 인사했다. 그 길로 단장에게 가서 말했다.

"저 그만 두겠습니다."

"아니, 왜?"

단장은 월급을 2만원으로 올려주며 나를 붙잡았다. 당시 밴드 마스터의 월급이 2만5000원이었다. 난 월급으로 치면 2인자가 됐다.

생활이 확 피었다. 난방이 되지 않고 담요 하나만 갖춰졌던 창고 방에서 나와 하숙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아랫목이 뜨끈했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윗목에 밥상이 놓여 있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처음으로 사는 맛이 났다.

신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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