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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책읽기] 성조기여 영원하라 … 영원할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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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한 때 사회과학계에서 '제국'이란 말은 경멸적이고 우수에 찬 언어였다. 근대화론이 맹위를 떨치는 그 시절, 제국은 사멸해갈 수밖에 없는 무능하고, 비효율적인 정치단위로 비춰졌다. 중국의 명청 제국, 오토만 제국 그리고 무굴 제국의 예가 그랬다. 제국들은 서구의 국민국가 단위의 열강에 유린 당했다. 국민국가의 효율성과 우수성에 밀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이다. 하지만 1989년 탈냉전 시대가 도래하고, 나아가 9.11 테러 이후 부시 행정부의 일방주의 독트린이 이라크 전쟁으로 이어지면서 미국의 위상을 '제국'에 비유하는 어법이 사회과학계에 갑자기 유행했다.

'제국' 관련 출판물은 꼬리를 이었다. 이번에 미국과 비유되는 제국은 찬란했던 로마 제국과 빅토리아조의 영국 제국이었다. 제국 담론은 그 용어를 부인하든 승인하든 유행이 됐다. 하지만 네오콘(미 공화당을 중심으로 한 신보수주의자)들이 '제국의 영광'을 노래하기도 전에, '제국의 몰락' 담론도 함께 유행하고 있다. '미국문화의 몰락'(모리스 버만), '제국의 몰락'(엠마뉘엘 토드), '모래의 제국'(로버트 메리)이란 책도 9.11을 전후해 국내 서가에 꽂혔다. 부시 행정부의 미국은 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탈냉전으로 가상적이 사라진 현실 속에서 미국의 지정학 전략가들은 제국 경영학이란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 내었다. 즈비그뉴 브레진스키.새무얼 헌팅턴.프랜시스 후쿠야마.조지프 나이.로버트 케이건 등은 향후 미국의 헤게모니를 장기화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세계를 관리해야할 것인가 질문하고 있다. 대부분은 현실주의 입장에서 조심스레 방책을 구사하고 있지만, 케이건을 비롯한 네오콘들은 미국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일방주의를 처방했다.

비록 네오콘이 부시 행정부에서 입지를 굳혀 대외정책을 좌지우지하고 있지만 이라크 전쟁의 교착 상태로 이제 급격하게 위축될 전망이다. 이런 상황에서 예전에 네오콘의 논리를 비판한 현실주의자들 내지는 헤게모니 쇠퇴론자들의 책을 다시 읽어보는 것도 향후 세계정세의 변화를 읽는 데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어차피 시계추는 다시 균형을 맞출테니까.

브레진스키의 '거대한 체스판: 21세기 미국의 세계전략과 유라시아'(1997)는 미국의 해양 지정학 전통(유라시아 봉쇄전략)에 서서 향후 미국 전략가들이 유라시아 대륙을 어떻게 공략해야 하는 지를 살펴보고 있다. 브레진스키는 적절한 '분할과 지배' 전략을 통해 유라시아 대륙을 분할시켜야 미국의 우세를 유지할 수 있다는 극히 현실주의적 처방을 후배들에게 내린다. 하지만 부시 행정부와 네오콘들은 그의 처방을 무시했다. 따라서 그의 눈으로 현정세를 보면 부시 행정부의 일방주의는 자살적 국가운영에 불과하다. 아주 유리했던 체스판을 다시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다는 평가이리라.

나이의 '제국의 패러독스'(2002)도 미국 파워의 한계를 설파한다. 비록 군사부문에서 압도적으로 단극적 우위를 확보하고 있지만 경제적 현실은 다극적 상황이라는 인식 때문이다. 초국가 관계의 체스판은 권력이 광범하게 분산되어 있다. 따라서 군사력에 초점을 맞춘 전략은 위험하다. 그는 '소프트파워'를 활용하여 헤게모니를 관리해야 한다고 낮은 목소리로 조언을 한다.

'미국 패권의 몰락'(2003)을 쓴 이매뉴얼 월러스틴은 미국의 헤게모니 하강은 이미 베트남 전쟁 이후 지속적으로 진행되어 왔다고 하는 '쇠퇴론'의 계보에 속한다. 제국의 위세는 이후 1968년 혁명,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 그리고 9.11 테러를 통해 약화되어 왔다. 독수리의 비행은 9.11 테러를 통해 "점진적인 하강"에서 "훨씬 더 급속하고 격렬한 추락"으로 바뀌었다. 그는 부시가 남긴 지정학적 유산을 '파리-베를린-모스크바-스페인 주축'을 만들어 대서양 동맹을 해체시킨 것으로 평가한다.

유럽의 지정학적 시선에서 본 '제국의 몰락'(이마누엘 토드, 2002)은 좀 더 직설적으로 미국의 허점을 지적한다. "세계는 민주주의를 발견하고 정치적으로 미국 없이도 지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미국은 (과두제화를 통해) 민주적인 성격을 상실하고 또 자기들이 경제적으로 (적자로 인해) 세계의 다른 지역이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따라서 이라크 전쟁이란 연극적인 요소가 다분한 '광인의 전략'에 불과하다. 소련 제국의 해체 이후 미 제국도 지금 해체 중에 있다는 전망이다.

한 때 일본 대장성 관료로 '미스터 옌'이라 불린 사카키바라 교수가 쓴 '경제의 세계세력도'(2005)는 아시아의 시선에서 미국의 지정학적, 지경학적 쇠퇴를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그 역시 월러스틴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경제력은 지속적으로 하강 국면에 있다고 말한다. 약한 달러 시대는 이미 시작되었다. 달러와 유로화와 경쟁할 수 있는 아시아 통화단위'아시아나'가 시급히 필요하다고 역설하는 그는 아시아에도 집단안전보장체제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바야흐로 '지정학의 시대'가 활짝 열렸다.

이성형<이화여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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