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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통령-종교계 지도자 대화록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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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전대통령-김추기경 대화>
▲전대통령=명동성당에서 어려운 일을 겪으셨는데 신부들이 앞장에 나서서 대화로 갈 수습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김추기경=정부에서 이해하고 관용을 베풀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학생들과 대화하는게 쉬운일이 아니었습니다. 정부가 강력히 대처한다고 해서 걱정을 했고 또 학생들을 설득하는데 이틀이 걸렸습니다. 밤새워 토론을 하면서 이런 식으로 하면 민주화가 안된다고 학생들을 설득하고 규칙은 지켜야 한다고 타이르느라 애를 먹었습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결정한 것을 안 따르고 힘으로 밀어 붙이면 나라 전체에 비극이 생기니 정부의 약속을 믿고 성당에서 나가달라』고 말했습니다.
▲전대통령=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김추기경=매일 성당주변에서 데모를 하는 바람에 최루탄 가스 때문에 혼났습니다. 人 체에 해를 안주고 눈물만 나오는 가스는 만들 수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전대통령=선진국에서는 최루탄만이 아니고 경찰봉과 무기까지 사용합니다. 우리는 오래전부터 경찰봉까지 없애고 방어벽으로 진압하고 있어 보고에 의하면 경찰이 많이 다치기도 한답니다. 최루탄을 없애려면 역시 데모가 없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김추기경=임기가 얼마 안남으셨으니 대통령께서 영단을 내려 민주화를 해놓고 나가신다는 자세로 일해 주시기 바랍니다.
민주화는 직선제도, 간선제도, 의원내각제도 다 민주화입니다.
그러나 현상황에서는 직선제를 받아주시는 것이 필요하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남은 임기동안 국민에게 봉사하는 자세로 시국을 풀어가시기 바랍니다.
그런 뜻에서 어제 김영삼총재와 만난 것은 참 잘하신 일입니다.
▲전대통령=고맙습니다. 어제 김총재와 만나 장시간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요구조건을 한꺼번에 다 들어줄 수는 없는것 아닙니까.
그러나 상당부분 의견을 들어 주었습니다.
연금해제와 구속자 석방문제는 내각에 지시했고 개헌논의도 재개하여 충분히 논의하도록 이야기했습니다.
다른 요구조건은 충분히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보겠습니다만 대통령이라고 해서 모든 일을 마음대로 이랬다 저랬다 할수는 없는 것입니다. 어떤 기준과 원칙에 따라 법이 정한 절차에 맞게 하기 때문에 시간이 걸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큰 문제인 헌법문제에 관해 김영삼씨에게 4· 13선언의 이유를 설명하고 백지로 돌아가서 모든 문제를 국회에서 여야가 논의해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김추기경=말씀대로 의논이 잘되고 실마리가 풀려 수습이 잘되면 다행이지만 그렇게 잘안될 것 같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노대표하고 의논하라고 말씀하셨다는데 노대표와의 회담은 어려움이 있는 것 같습니다. 직선제든 국민투표든 국민이 원하는 방식으로 해주시고 또 국기를 흔드는 사람이나 파렴치범을 제외하고는 정치적 이유로 잡힌 사람은 다 풀어주시는게 좋겠습니다.
▲전대통령=제가 어제 말한것은 진실입니다. 실질적으로 노대표에게 모든 정국운영의 책임과 권한을 이양했고 실질적으로 민정당은 노대표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나는 가능한한 안보문제, 남북관계, 그리고 올림픽등 국가적 문제에만 전념하고 싶습니다.노대표를 앞세워서 섭정한다는 이야기는 정치권력의 속성을 모르는 소리거나 나쁜 심리로 만든 이야기가 아닌가 합니다. 노태우대표는 그분 나름의 새로운 생각과 인물로 정국을 이끌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솔직이 말해서 나는 앞으로 물러나면 잠을 한번 실컷 자보고 싶고 여행도 좀 하고 평소에 읽고 싶던 책도 읽고 기타 여러가지 나름대로의 계획이 있습니다.
▲김추기경=이제까지 제가 드린 말씀을 참고해 주시고 국민의 뜻을 받아들이는 영단을 내려 민주화의 기틀을 세워 주시기 바랍니다. 국민의 축복속에 퇴임하셔서 계획한 일들을 하시게 되길 바랍니다.
그렇게하여 역사에 빛나는 대통령이 되셨으면 합니다.
▲전대통령=말씀 잘 들었습니다. 추기경께서 말씀하신 것을 국가원수로서 당장 이렇게 한다 저렇게한다 답변 드리면 경솔한 일이 될것입니다. 추기경께서 하신 말씀은 국정에 깊이 참고하겠습니다.

<전대통령-한·강목사 대화>
▲전대통령=지금 시국이 시끄럽기 때문에 두분 원로의 좋은 의견을 듣기 위해 오시도록 했습니다.
순수한 종교계 지도자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한경직목사=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라와 국민을 위해 기도를 드리는데 청와대에 와서 성경말씀 한구절을 읽겠습니다 (주기도문을 낭독) .
하느님이 우리나라를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우리국민이 대통령을 존경하는 것은 평화적 정부이양을 약속하고 그것을 그대로 실천하고 있어 그대로 되면 우리 정치사에 첫 모범이 될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당의 총재가 아닌 대통령으로서 남은 임기동안 개헌을 실현시켜 앞으로 우리나라 민주주의 뿌리를 내린 역사의 지도자가 되어 주십시오.
여러 업적이 많지만 헌법이 완전히 민주화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민심의 동향입니다. 여러사람들과 얘기해 봤는데 표현은 다르지만 대통령의 영단을 기대하고 있는것 같습니다. 대통령께서 수습책을 내주시면 사회는 안정이 되고 외국에서도 이해할 것입니다.
▲강원용목사=개신교를 대표하는 한사람으로 들어온 것이기 때문에 조금은 다른 각도에서 얘기하겠습니다. 해방후 우리나라는 여러가지 시련이 많았고 우리 국민도 어려운 고비를 숱하게 극복해온 슬기로운 국민입니다.
적어도 10·26에서 5·17 까지의 악순환은 다시 되풀이 되지 않도록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우리국민 가운데는 어느정부나 따라가는 순민, 항상 정부에 불평하고 반대하는 원민, 그리고 기맥이 통하면 잘 도와주지만 빗나가면 나라를 어지럽게 하는 호민등 세종류가 있는데 중산층이라 할수 있는 호민의 지지를 받아야 합니다.
이러한 중산층의 마음을 한데 묶으면 민주화도 되고 복지화도 되는데 이들의 지지를 받으려면 두가지를 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중 하나는 대통령께서 단임의 약속을 지킨다는 것은 아무런 의심이 없는데 다음 정부가 국민의사에 의해 선택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사람만 바뀔뿐 종전과 다름이 없다고 생각하는것 같습니다.
두번째로는 도덕성 회복문제인데 범양사건이나 복지원사건이 종교인들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민심의 소재를 분명히 파악해서 호민(중산층)의 마음을 풀어주는 과감한 정책이 나와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여당과 야당은 같은 보수세력이니 누가 잡든 정책의 방향은 큰 차이가 없습니다.
어제 김영삼씨를 만난 것은 잘하셨습니다. 건전한 야당을 키워야 합니다. 통치는 잘되는데 정치가 안되어 간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같은 보수세력으로 여야는 주고받는 정신으로, 또 공개·비공개로 자주 만나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나누어야 하며 그래서 진정한 의미의 화합이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남은 8개월이 짧은 기간이 아니기 때문에 다시는 불안과 갈등의 악순환이 없는 민주발전의 과정이 이뤄지도록 거시적인 안목에서 잘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전대통령=좋은 말씀들 감사합니다.
정치가 발전하려면 제도 자체보다 제도를 운영하는 묘를 살려가면서 점차 발전해 나가야 하는데 항상 최고 책임자에 대한 불신이 있어 어려운 점이 많았습니다. 나 자신은 지도자부터 신뢰회복을 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단임이라는 국민과의 약속을 실천하려는 것입니다. 처음엔 많은 사람들이 상당 기간동안 믿지 않다가 민정당의 대통령후보가 선출되기 시작하면서 물러 나는게 확실해지자 정권 이양 취약기에 나타날수 있는 여러가지 현상이 생겨난 측면도 있습니다. 강목사님 말씀대로 우리 국민은 정의감이 강하고 감성적인데가 있습니다.
어려운 때일수록 힘을 가지고 해결하려는 방식은 삼가려하고 있습니다. 우리 국민이 감성보다 이성으로 활로를 찾으려 노력한다면 수습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성취는 수십년 걸리지만 파괴는 며칠만에도 할 수 있습니다. 그간 쌓아온 기반위에서 다른 사람이 정권을 맡아 더 잘할 수 있도록 우리국민들이 정부이양의 취약기에 정부를 도와주는 성숙하고 발전된 시민의식이 필요합니다.
폭력의 악순환이 아닌 평화적 정부이양의 전통이 반드시 이룩돼야 합니다. 정부가 잘못 할때 기분 나쁘게 생각하는 국민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고 헌법을 바꾸어야겠다는 여론도 이해할수 있습니다. 다행히 경제가 잘 돌아가고 있기 때문에 호기를 놓치지 않도록 남은 기간동안 통치역량을 최대로 발휘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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