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러 ‘스트롱맨 시대’…부드러운 유럽 정상들 흔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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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등 카리스마와 강성 이미지를 지닌 스트롱맨(strongman) 시대를 맞아 온건 이미지를 가진 유럽 주요국 지도자들의 입지가 흔들리고 있다. 미국·중국·러시아 지도자들이 ‘철권 외교(Iron-fist diplomacy)’를 휘두르고 있어 온건한 유럽 지도자들의 입지 약화는 세계 정세를 더욱 불안하게 하고 있다. <본지 12월 26일자 1·4·5면>

가장 수세에 몰린 이는 11년째 장기 집권 중인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다. 지난달만해도 “메르켈이 이끄는 독일이 서구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수호하는 최전선에 서게 될 것”(미국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상황이 급변했다. 지난 19일 독일 베를린 크리스마스 시장을 덮친 트럭 테러의 범인이 튀니지 출신 난민 신청자로 드러나며 친난민 노선인 메르켈의 인기는 뚝 떨어졌다. CNN은 “내년 최대 패자는 메르켈이 될 것”이라며 “사실상 유럽의 가장 강력한 지도자였지만, 독일에 거의 100만 명의 이민자를 들이며 5년 만에 지지도가 최저치로 하락했다. 대중의 분노는 점점 커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독일 트럭 테러 유탄 맞은 메르켈
CNN선 “내년 최대 패자” 지목
경제난 스페인 리더십 불안 지속
영국 메이 총리 인기 갈수록 시들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에서 네 번째로 경제가 큰 스페인의 리더십은 경제 위기로 흔들리고 있다. 2012년 국제 채권단의 구제금융을 받은 스페인은 유럽연합(EU)과의 재정적자 감축 약속을 지켜야 하고 20%에 달하는 높은 실업률도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서 10개월간 무정부 상태가 지속됐다. 마리아노 라호이 총리의 연임이 의회에서 결정되지 않아서였다. 지난 10월 가까스로 연임이 확정됐지만 국정 운영이 제대로 될지는 미지수다. 경제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라호이의 지지도가 급락한 데다 그가 이끄는 국민당이 지난 6월 총선에서 의석 과반을 차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난 23일 취임한 이탈리아 파올로 젠틸로니 총리 역시 불안하긴 마찬가지다. 마테오 렌치 전 총리의 꼭두각시란 평가를 받고 있어서다. 렌치는 의회 시스템을 개혁하겠다며 개헌안을 국민 투표에 부쳤다가 부결되자 사임했다. 그러나 젠틸로니는 렌치의 내각을 그대로 답습하며 새로운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해 “이탈리아 유권자들은 민주당으로부터 더 멀어지고 있을 뿐”(가디언)이란 비판을 받고 있다. 문제는 이탈리아에서 세 번째로 큰 은행 방카몬테데이파스키디시에나(BMPS)에 구제금융 투입이 결정되는 등 경제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이다.

영국도 ‘제2의 마가릿 대처’로 기대를 모으며 지난 7월 취임한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의 입지가 처음 같지 않다. 파이낸셜타임스가 ‘올해의 여성’에 선정할 정도로 고른 지지를 얻고 있으나 EU 탈퇴 협상이라는 난제 앞에 서 있다. 다른 유럽 정상들의 시선도 곱지 않다. 영국 전역에서 항공·철도·우체국 파업이 진행되는 등 국내 사정도 편안하지 않다. 대처 전 총리 시절 장관을 지낸 데이비드 멜로는 영국 방송사 스카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메이 총리를 제2의 대처로 비유하는 건 완전히 틀렸다. 결의가 허약한 사람이라 주도권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 지금 정부가 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고 비판했다.

임주리 기자 ohmaj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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