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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달 한국은행이 돈 찍어 일곱 차례 추가예산 편성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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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4호 21면

1 1954년 11월 29일 이승만 대통령의 3선을 위한 개헌안 가결 직후 민주당 이철승 의원(왼쪽)에게 멱살 잡힌 최순주 국회부의장. 숫자에 밝았던 최순주는 숫자 때문에 망가졌다. 재무장관 때는 환율을 인상하여 서민의 적이 되었고, 국회에서는 사사오입 개헌안을 무리하게 통과시켜 헌정사에 남는 악인이 되었다. 2년 뒤 지병으로 미국에서 임종(55세)했다.

아즈텍 왕국의 마지막 왕 콰우테목(Cuauhtemoc)은 1520년 스페인 침략자들의 포위망을 뚫고 후퇴할 때 참으로 어리석었다. 누가 봐도 왕이 탔음직한, 크고 화려한 배에 타서 요란한 소리를 내며 주목을 끄는 바람에 집중공격을 받고 붙잡혔다. 왕은 항상 당당하고 품위 있어야 한다는 아즈텍 사회의 정석을 고집한 결과였다. 그래서 바둑에서는 “정석을 배웠으면, 정석을 잊으라”고 가르친다.


정석만 고집하다 낭패를 본 것은 일본의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도 마찬가지다. 현재 도쿄에는 육군대장 노기의 충성심을 기리는 신사(神社)가 있지만, 1904년 여름 그가 러일전쟁 당시 뤼순(旅順) 요새를 점령하기 위해서 치른 비용을 보면 그는 틀림없는 바보였다. 러시아 군대가 해발 203m의 난공불락 요새 안에서 분당 500발이 발사되는 기관총과 대포와 수류탄으로 무장하고 있는데, 노기 장군은 대검이 달린 소총을 쥐어 주고 언덕을 향해 “돌격 앞으로”만 외쳤다.


빤한 작전을 매일 되풀이한 결과 191일간 13만 명이 투입되어 6만 명의 사상자가 생겼다. 그의 두 아들도 사망했다. 결국 러시아 군의 식량이 다 떨어진 뒤에야 요새가 함락됐다. 70년 뒤 시바 료타로(司馬遷太郞)는 소설 『언덕 위의 구름(1974년)』에서 노기의 아둔한 정석 플레이를 통렬하게 고발한다.

2 해방 전 연희전문학교 상과 교수 시절의 최순주 모습. [사진 한국은행]

[유엔군 주둔비용, 미국 보증으로 대출해 줘]불행인지 다행인지, 한국전쟁 때는 아예 정석이 없었다. 모든 일이 임기응변이었다. 재정정책도 예외가 아니었다. 1950년 4월 정부회계연도가 시작될 때는 균형예산을 계획했다(회계연도가 1월 1일에 시작하는 시스템은 1957년부터 시행됐다). 해방 이후 계속된 인플레이션을 퇴치하려면 균형예산과 독립된 중앙은행 설립이 필수라는, 미 경제협력처(ECA)의 충고를 성실히 이행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두 달 뒤 전쟁이 터지면서 모든 것이 틀어졌다. 세출은 봇물 터지듯 늘고 세입은 가물었다. 결국 1950년 세입(재정수입)의 62%를 한국은행이 돈을 찍어 채웠다. 한국은행의 모델인 미국식 중앙은행과는 거리가 멀었다.


예산의 편성부터 임기응변이었다. 1950년 6월 27일 밤 대전으로 내려 온 김유택 재무차관은 그 다음날 임시 정부청사인 충남도청으로 출근했다. 거기서 마주친 박희현 회계국장(훗날 재무·상공장관)과 빈 방에 들어가 부랴부랴 ‘사변 수습 비상 경비예산’을 편성했다. 말이 예산이지, 한 달 간 재정지출액을 대충 가늠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때부터 박희현 국장은 매달 세출(재정지출)액을 새로 계산하고, 김유택 차관이 이를 결재하는 일을 반복했다. 덕분에 1950년에는 일곱 차례나 추가경정예산이 편성되었다. 그때마다 한국은행은 돈을 찍었다.


두 사람이 그런 일을 할 때 대통령과 장관은 빠져있었다. 대통령은 혼자서 바쁠 때가 많았다. 유엔군이 전투배치를 마치고 미 제8군 사령부가 대구에 설치되던 7월 9일에도 혼자였다. 긴박했던 그날, 바야흐로 제3차 세계대전을 준비한다며 경호원만 데리고 새벽에 대전을 출발해 이리·목포·부산을 거쳐 대구로 대피했다. 국무위원들은 뒤늦게 전주로 우르르 내려가서 대통령을 수소문했다. 우왕좌왕하다가 대전으로 돌아갈 때 야당의 조병옥이 “야, 국무위원 멍텅구리들아”라고 야단을 치자 그들은 못 들은 척 했다. 그럴 정도로 정부는 뇌사상태였다. 7월 14일 정부가 대구로 또 다시 후퇴하면서 군 작전지휘권을 미국에 이양한 것은, 겨우 숨통만 붙어 있는 한국 정부가 스스로에게 내린 금치산선고였다.


최순주 재무장관도 국내 예산문제에 집중할 수 없었다. 그는 대통령 곁에 머물며 미국과 협의하는 일에 집중했다. 7월 1일 미국 지상군 선발대가 부산에 도착했으나 이들에게는 한국에서 먹고 쓸 돈이 없었다. 미국 의회가 아직 예산을 승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민주국가가 외국에 파병할 때는 돈도 함께 보내야 한다. 군대만 보내면, 청일전쟁 때 조선을 돕는다며 진출하여 현지에서 군량미를 수탈한 일본군과 다를 바가 없다. 2005년 한국이 이라크에 파병할 때도 1609억 원의 예산을 편성했다.


며칠 뒤 도착한 다른 유엔 참전국 부대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최순주는 무초(John J. Muccio) 주한 미국대사와 협의해 일단 한국은행이 유엔군에게 대출하고, 미국이 나중에 책임지고 갚는다는 협정을 맺었다(‘유엔군 경비지출에 관한 협정’, 7월 28일). 이렇게 해서 한국은행은 정부뿐 아니라 유엔군의 돈줄 노릇까지 맡게 됐다.

3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치하하며 맥아더 원수에게 훈장을 달아주는 트루먼 대통령(가운데는 무초 주한 미국대사). 50일 뒤 중국이 한국전쟁에 개입하자 두 사람의 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었다. 4 인천상륙작전 직후의 한국은행 인천지점. 원래 건물이 폭격으로 파괴된 탓에 새 사무실은 그야말로 ‘판잣집’이었다. [사진 트루먼 기념관, 한국은행]

[달러당 450원 공정환율, 실제 가치 네배 달해 ]최순주의 최대 고민거리는 환율이었다. 해방 직후 연합국 최고사령부(SCAP)는 ‘1달러=15엔=15원’을 선언했지만 큰 의미는 없었다. 국제무역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이 환율은 한미 양국 정부가 원조금을 기록할 때만 쓰였다. 하지만 무역이 시작되면서 이 환율로는 경제가 작동하기 힘들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후 공정환율이 달러당 50원(1947년 7월), 450원(1948년 12월)으로 인상됐다. 여전히 시장환율과는 몇 배의 차이가 있었다.


공정환율이 현실과 크게 달랐던 것은, 이승만 대통령이 원화가치를 낮추는 것(환율인상)을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화가 고평가될수록 수입생필품 가격이 싸져서 서민들에게 유리하다는 것이 대통령의 신념이었다. 경제원리에 어긋난 대통령의 포퓰리즘은 콰우테목 왕의 행차처럼 요란했고, 노기 장군의 고집처럼 막무가내였다. 취임 직후인 1949년 6월 최순주 장관이 복수환율 제도를 발표하자 대통령이 “환율은 여전히 450원 대 1달러를 고수할 것”이라는 담화를 통해 무효로 만들었다. 그러니 아무도 환율인상을 거론할 수 없었다.


결국 외환전문가인 김진형 조선환금은행 부총재가 나섰다. 무역업자들에게 외환을 팔 때 경매를 감행해서 당시 시세가 1800원 대 1달러 정도임을 호소한 것이다. 하지만 전쟁이 터지자 그 환율도 의미 없는 것이 됐다. 결국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이 수복된 뒤 ECA가 환율문제를 거론했다. 두 달 전 맺은 계약에 따라서 한국은행이 유엔군에 대출해 준 돈을 갚아야 하는데, 원화가 지나치게 고평가되어 달러로 상환해야 할 금액이 컸기 때문이었다. 미국 관리들은 최순주에게 조속한 대출금 상환을 조건으로 환율 인상을 요구했다.


미국 경제학 박사인 최순주가 보기에 대출금 회수는 시급했고, 환율인상은 당연했다. 무역적자가 계속 확대되는데다가 전쟁 발발 이후 국내물가가 2.7배나 뛰었다. 그래서 구용서 한국은행 총재를 데리고 찾아가 대통령을 설득했다. 대통령은 몹시 못마땅했다. 그래서 구용서에게 환율인상이 시급하지 않다는 의견을 구했으나 구용서는 거들지 않았다. 민망해진 대통령은 “I am very unhappy”라고 버럭 소리를 지르며, 자리를 박찼다. 귀청이 터지도록 문을 세게 닫고 나갔다.


[환율 인상 총대 멘 최순주, 장관직 잃어]1950년 11월 1일 공정환율이 달러당 2500원으로 인상됐다. 그러나 이듬해 3월 5일 결국 재무장관이 경질됐다. 환율인상에 따른 수입품 가격상승과 여론악화의 책임을 물은 것이다. 최순주의 뒤를 이은 사람은 백두진이었다. 구용서는 조선은행에서 오랜 기간 후배이자 부하직원이었던 백두진을 금융통화위원회 의장으로 맞이하게 돼 난감했다. 그해 연말 구용서는 “유엔군 대출금의 상환이 시작돼 나의 역사적 소명은 끝났다”며 사임했다.


한편, 정부가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판국에 물가안정은 공염불이었다. 그래서 한국은행도 통화정책의 정석을 일찌감치 포기했다. 그 시작은 지급준비제도였다. 한국은행 설립 당시 금융통화위원회는 여러번 지급준비제도를 논의했지만, 경험이 없는 일이라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그러다가 전쟁이 터지면서 곧 잊어버렸다. 그렇게 돈을 푸는데도 지급준비제도는 1952년 4월까지 작동하지 않았다. 금리조절도 전쟁 내내 세 번에 그쳤다.


한국은행은 지급준비제도나 금리조절 대신 케케묵은 방법들을 동원했다. 지난날 조선총독부처럼 개별 금융기관의 융자내역을 일일이 사전 승인했으며 심지어 조선은행처럼 개인과 민간기업에 직접 대출하기도 했다. 분명 후진적 통화정책이었지만, 한국은행의 힘과 영향력을 과시하기에는 좋았다. 1951년 초 도입된 대출한도제와 융자 사전승인제도는 전쟁이 끝난 뒤에도 계속됐다.


한국은행이 민간에게 직접 위세를 떨치자 부산 임시본부에서는 피난민이, 도쿄지점에서는 무역상들이 몰려와 대출을 호소했다. 그런 가운데 내부에서는 헤게모니 싸움이 고개를 들었다. 백두진 재무장관은 그런 한국은행의 모습이 비정상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구용서 총재를 사임시켰다. 장관의 입김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것이 다음 이야기의 주제다.


차현진 한국은행 인재개발원장hyeonjin.cha@bok.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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