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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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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호 29면

‘문학성’이라는 추상적이고 변덕스러운 가치를 알기 쉽게 중량으로 환산할 수 있는, 가령 ‘문학 질량’ 같은 측정 단위가 있다면 한 번 적용해 보고 싶은 작품들이 있다. 대개 뒤늦게 그 작품의 가치에 대해 궁금증이 생긴 경우다. 미국 작가 존 윌리엄스(1922∼94)의 장편 『스토너』가 그런 작품이다.


계기는, 날카로운 감식안을 가졌으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작가들의 고백 때문이었다. 소설가 김연수와 조해진이 입을 모아 이 작품을 좋은 소설로 꼽았다. 물어본 시기는 달랐지만 “최근 재미있게 읽은 소설이 뭐였느냐”는 질문에 공교롭게도 같은 책을 골라냈다. 김연수의 대답은 비교적 오래전 일이라 이유를 뭐라고 했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최근에 만난 조해진의 답은 “다큐멘터리처럼 실감 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두 사람을 만나 그런 대화를 나누기 전, 그러니까 책이 막 시장에 나와 리뷰 기사를 쓰기 위해 읽을 때, 사실은 전체적으로 심심하다는 인상을 받았었다. 미주리주의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소설의 주인공 윌리엄 스토너가 십중팔구 농사꾼이 되기 쉬웠을 태생적 운명을 극복하고 영문학을 공부해 대학교수가 되는, 주인공 본인의 입장에서는 자랑스러울 수 있겠으나 긴 시간과 광활한 공간의 관점에서 보면 과연 장편의 주인공이 될 만한 특출난 주인공인 것이냐라는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 정도로, 어쩌면 평범한 일생을 아무런 소설적 기교 없이 연대기순으로 늘어놓아서였다. 다만 동료 영문과 교수들과의 알력 속에 펼쳐지는 영문학 관련 논쟁이 현란하고, 중년 이후 찾아온 딸뻘 여성 강사와의 연애 사건이 짜릿했다는 인상이 흐릿하게 남아 있는 정도다.


그런데 최근 여러모로『스토너』를 연상시키는 소설을 만났다. 이 달초 세상에 나온, 역시 국내에는 덜 알려진 미국작가 켄트 하루프(1943~2014)의 장편『밤에 우리 영혼은』(뮤진트리)이다. 윌리엄스처럼 하루프도 과작(寡作)이었다. 작품을 발표한 지 50년이 지나 줄리언 반즈, 톰 행크스 같은 이들에 의해 입소문을 타면서 본격적으로 알려진『스토너』처럼, 『밤에…』역시 뒤늦게 세상과 만났다. 다름 아니라 하루프의 유작이어서다. 폐질환으로 사망하기 직전에야 가까스로 탈고한 작품이라고 한다.


무엇보다 작품의 고즈넉한 분위기가 둘은 닮았다. 연상시키는 장면을 꼽으라면 해가 뉘엿뉘엿 지는 황혼녘, 평범한 것 같으면서도 결코 단순하지 않은 인생 드라마가 실감나게 펼쳐진다.


콜로라도에 있는 가상의 마을 홀트에 사는 칠십 할머니 에디 무어가 어느 여름날 저녁 비슷한 연배의 할아버지 루이스 워터스를 찾아가 뜻밖의 제안을 한다. 가끔 자기 집으로 자러 오라는 것. 나이 들어도 식지 않는 욕망 해소를 위해서가 아니라 따뜻한 육체를 가진 누군가와 한 침대에 나란히 누워 세상 무엇보다 견디기 어려운 기나긴 밤을 함께 보내자는 얘기다.


각자 배우자를 사별한 지 오래인 둘은 소울메이트임이 밝혀진다. 소설의 설정이 그렇다. 지금 짝에 만족 못하는 현실의 독자 누구라도 부러워할 만한 내용이지만, 소설은 단순히 판타지를 자극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자식들의 반대에 부딪쳐 결국 파국에 이르는 지극히 현실적인 결말을 선택한다.


기막히다면 기막힌 사연을 전하는 소설의 문장은 단순하기 짝이 없다. 문체 과잉에 서사 결핍이라고 비판받는 한국의 어떤 소설들 정반대 편에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궁금하다. ‘문학 질량 측정기’에 달아본다면 과연 어떤 결과가 나올까. 이 소설은, 그리고 한국 소설은.


글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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