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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적극 지지해주지 않았다면 일·육아 병행 못했을 것”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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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1호 8 면


대사 부인, 의료서비스 회사 임원, 그리고 두 아이의 엄마. 일반에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의 부인 로빈 리퍼트 여사는 1인3역의 주인공이다. 지난 학기에 이어 이번 학기에도 숙명여대에서 리더십 강의를 했다. 보통의 대사 부인들의 행보와는 확연히 다른 생활이다. 게다가 두 아이를 모두 서울에서 낳은 미국 대사 부인이라는 색다른 ‘기록’을 세웠다. 2년 반 전 만삭의 몸으로 한국에 와 아들 세준(제임스 윌리엄)을 낳은 데 이어 지난달 14일엔 딸 세희(캐럴라인)를 출산했다.


어떻게 이 많은 일을 해낼 수 있었을까. 그는 수퍼우먼인가. 지난 21일 멋진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꾸며진 서울 정동의 미국 대사관저에서 리퍼트 여사를 만났다. 그는 “아이를 돌봐주는 보모가 있지만 마크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며 “마크는 세준이가 악몽을 꾸면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자고 기저귀도 갈아줬다. 내 일을 적극 지지해주지 않았다면 난 절대로 이 모든 일을 할 수 없었을 것”이라며 남편 리퍼트 대사에게 공을 돌렸다.


리퍼트 여사는 서울 생활 중 가장 보람 있었던 일로 숙명여대 강의를 꼽았다. 그러면서 “나는 직장을 옮길 때 목표를 설정하기보다 그 회사에서 정말 존경스럽고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사람이 있는지를 보고 이동했다”며 “한국의 젊은 여성들에게 인생의 멘토를 찾으라는 충고를 하고 싶다”고도 했다.


이들 부부는 2000년 미국 상원 세출위원회에서 함께 일하다 만나 결혼했다. 이후 리퍼트 여사는 금융서비스 회사를 거쳐 현재는 유나이티드헬스 그룹의 부사장으로 일하고 있다. 인터뷰는 ‘커리어 우먼 리퍼트’에서 시작된다.


-한 달에 한 번꼴로 미국 출장을 간다고 들었다. 평소엔 어떻게 업무를 처리하나.


“남편이 한국에 부임했을 때 회사와 협의해 2017년 1월 복귀하는 조건으로 계속 일하기로 했다. 미국 시간에 맞추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밤샘 작업을 한다. 본사와 인터넷과 화상으로 업무를 보는데 놀라운 기술 발전으로 생각보다 훨씬 수월하고 차질 없이 일하고 있다. 한 달에 한 번은 미국 내 거래처에 출장 가는 일을 하면서 지난 2년 반을 지냈다.”


-밤엔 회사일 하고 낮에는 아이들을 돌봐야 하는데 어떻게 생활을 유지하나. 잠은 안 자나.


“미국 시간으로 업무가 끝나면 한국 시간은 오전 10시쯤 된다. 어려울 것 같지만 사실 이러한 상황이 오히려 세준이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해준다. 틈틈이 잠을 자고 쉰다. 미국에서 일을 했다면 회사를 마치고 돌아오면 아이가 벌써 잠들어 있었을 텐데 오히려 이렇게 밤낮이 바뀌어 일을 하니 세준이와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낼 수 있었다. 물론 체력적으로 힘들었다. 솔직히 다시 동료들이 일할 때 같이 일하고 잘 때 잘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하니 기대가 된다. 하지만 거의 24시간을 활용해 엄마와 직장인의 역할을 다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정말 기가 막힌 일이었다.”


-미국 대사 부인으로서의 역할도 만만치 않았을 텐데.


“나는 인생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이 중요하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에 맞추어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회사 업무는 어느 정도 유지할 수 있었고 남편과 같이 가야 할 행사에도 모든 걸 할 순 없었지만 가능한 한 많이 참석했다.”


-대학 강의 제안을 받고 망설이지 않았나.


“제의를 받았을 때 서슴치 않고 수락했다. 한국에 살면서 의미 있고 한국 사람들과 진정으로 교류할 수 있는 기회를 갖길 원했다. 그래서 이 기회가 매우 소중했고 한국을 떠나도 가장 아쉬운 것 중 하나로 남을 것 같다. 주한 노르웨이·캐나다 대사 부인과 공동으로 맡은 ‘글로벌 리더십과 네트워킹’ 강의였는데 한국 학생들의 관심사, 걱정, 희망, 그리고 미국에 대한 진솔한 생각을 들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학생들과 주로 어떤 대화를 나누나.


“많은 여학생이 나에게 결혼과 커리어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지 물어본다. 미국에서 기업 CEO나 임원을 하는 여성 중 가정을 갖는 비율이 얼마나 되는지, 이들 중 행복한 가족을 꾸리는 사람은 얼마나 되는지 묻는다. 또 중요한 순간에 아이 옆에 있을 수 있느냐는 예리한 질문도 한다. 사실 이러한 것들이 매우 중요한 문제다. 나는 진솔하게 답변한다. 분명히 trade-off(길항작용, 균형을 맞추려는 노력)가 있다고. 마크와 결혼 초기에는 집에서 내가 좋아하는 요리도 더 많이 하고 운동도 더 많이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운동을 더 많이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요리보다 테이크아웃으로 식사를 대체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필수적이고 부부가 같이 상의하면서 해낼 수 있는 적응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학생들에게 어떤 충고를 해주나.


“특히 여성들은 롤 모델이나 인생의 멘토를 찾는다는 것이 큰 힘이 된다는 점을 강조했고 롤 모델을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에 대해 많은 대화를 나눴다. 나는 대학 시절부터 정치권(상원)에서 일도 해보고 지금의 회사로 옮기게 됐는데 다양한 일을 하면서 커리어를 이어갈 때는 하나의 목표를 설정하기보다 사람과 열정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젊은 여성들에게 인생의 멘토를 찾으라고 충고한다.”


-한국에서 두 아이를 낳았다. 인상 깊었던 순간들을 꼽는다면.


“산모로 한국에 있었던 것이 축복이었다. 여기서는 미국과 달리 아이를 낳는 산모는 대접받고 축복의 대상이었다. 세준이를 낳았을 때는 내 입맛에 안 맞을 것 같다면서 미역국을 주지 않았다. 이번에 세희를 낳고 미역국을 처음 먹었는데 너무 맛있었다. 세준이를 낳고 못 먹은 것이 아쉽기까지 하다.”


-가장 좋지 않은 기억은 리퍼트 대사가 테러당했을 때가 아닐지.


“물론 그렇다. 너무나 무서웠던 순간이다. 처음에는 어떤 상황인지 잘 감이 안 왔는데 병원에 도착해 마크가 괜찮은 것을 확인하고서야 안심이 됐다. 의료진의 치료와 배려는 최고 수준이었다. 우리가 받은 한국 국민의 지지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감동적이었다. 어디를 가든 한국 사람들은 마크의 안부를 묻고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안부와 빠른 쾌유를 비는 수많은 트위터 메시지는 우리에게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위로가 됐다. 마크에 대한 테러는 기억하게 되겠지만 절대로 한국 생활의 추억이나 한국인들에 대한 인상을 결정짓는 사건은 아니다.”


  리퍼트 대사 부부는 아들 세준에게 영어가 아닌 한국말을 가르친다. 영어는 미국에 돌아가면 금방 배울 테니 지금은 한국어에 집중하자는 생각에서다. 한국어 실력이 상당한 리퍼트 대사는 세준에게 늘 한국말로 대화한다. 그러다 보니 세준의 한국어도 꽤(?) 늘었다고 한다. 리퍼트 여사가 들려준 에피소드 한 토막.


“어느 날 내가 세준이가 제일 좋아하는 ‘뽀로로’ 동화책을 천천히 읽어주고 있었어요. 그런데 세준이가 갑자기 한숨을 쉬더니 나한테서 책을 빼앗아 한국 유모에게 갖다 주며 읽어 달라고 하는 거예요. 아무래도 내가 한국말로 읽는 것이 답답했던 모양이에요.”


세준이가 처음 말을 한 단어는 ‘daddy’ ‘mommy’가 아니고 ‘꽃’이었다고 한다. 카펫에 그려진 그림과 주위에 놓여 있는 꽃을 가리킨 것이다. 얼마 전 리퍼트 여사는 세준이와 함께 주한미군 기지에서 운영하는 ‘엄마와 아이가 같이하는 음악교실’에 참석했다. 모든 수업이 영어로 진행되는데 세준이가 영어 단어력이 부족해 미국 선생님을 따라 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우리 아이의 영어가 달리는구나”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고 한다.


-세준·세희가 한국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 것으로 보는가.


“한국에서 세준·세희를 낳았기 때문에 한국적이고 국제적인 교육의 장점을 최대 유지하려 한다. 세준이가 밤낮으로 ‘뽀로로’ 비디오를 보기 때문에 세희도 배 속에서부터 한국말에 대한 간접 교육(?)을 받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아이들에게 한국과 특별한 인연이 있다는 것을 잊지 않게 할 생각이다. 한국 이름을 지어준 것도 다분히 이러한 의도가 있는 것이다. 한국을 떠나더라도 아이들을 데리고 자주 한국을 방문할 생각이다.”


리퍼트 여사는 “특히 세준이는 여기서 매우 특별한 생활을 누렸다. 아빠와 야구장도 여러 번 갔고 세계적인 문화재도 구경하고 김치 담그는 데에도 여러 번 참여했다. 한국에 오면 왠지 편안하고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게 될 것”이라며 “이 모든 것으로 인해 한국은 우리 아이들에게는 제2의 고향이 될 것 같다”고 했다.


손지애 이화여대 초빙교수 jieaesohn@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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