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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인의 작가전] 인 더 룸 #4

중앙일보

입력

발신자는 언니.

그 쌍년.

자니? 자고 있으면 내일 아침에 전화해.
안 자면 지금 당장하고.

전화를 받지 않자 문자가 왔다. 문자를 확인한 후 핸드폰을 그대로 가방에 넣었다. 태하 생각이 일순간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다시 걸려오지 않는 거로 봐선 다급한 일은 아니다. 언제나처럼, 내가 얼마나 잘 살고 있지 못한가를 확인하고 안심하려는 것이다.


이 집에 사는 여학생
이 미래 여관에 남자
와 함께 들어갔고 추
잡한 짓을 했다.
신음소리가 너무 커
바깥에서도 다 들려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쳐다봤다.
보지가 벌렁거렸다.
나도 언젠가 널 먹겠다.

꽤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난 지금도 뚜렷하게 기억한다. 학교에서 돌아오자 거칠게 내 머리채를 잡던 아버지. 끌려간 골목 담벼락 앞에 우리 집 주소와 함께 적혀있던, 글자 크기가 제각각 다른 검은색 페인트 글씨. 그리고 철 수세미로 벽의 낙서를 힘없이 지우고 있던 언니. 옆에서 표정이 굳는 내 얼굴을 노려보던 아버지는 팔을 세게 휘둘렀고 따귀를 얻어맞은 나는 그대로 바닥에 꼬꾸라졌다.

"야 이 미친년아, 빙신 같은 기 집안 망신을 시켜도 유분수지. 발정 난 개가? 이게 뭐하는 짓이고? 동네 챙피해서 살긋나! 어디 대가리 피도 안 마른 년이 오입질하고 다니노!"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라 볼에서는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네?... 아버지… 저 아니에요."

"아가리 찢어 뿐다. 거짓말하지 마라."

“저 진짜 정말 아니에요…”

“대라, 누구랑 갔노!”

“정말이에요... 저 몰라요..."

“누구랑 갔노!!!”

“왜… 저는... 진짜 아니에요..."

"와, 말 못하겠나? 그라믄 그 새끼 찾아가서 같이 살아라. 내 눈에 띄믄 직이뿐다. 그라고 이거 다 지워놓고 가라."

아버지는 언니가 들고 있던 수세미를 빼앗아 나에게 매정하게 던지고는 돌아섰다.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아 있었다. 당연히 나는 모르는 일이었지만, 누가 무슨 이유로 그런 낙서를 했는지 의문은 들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온통, 돌아서기 전 언뜻 보였던 언니의 비웃는 얼굴이었다.

*

빠른 속도로 달리는 택시 때문에 몸이 의자에 바짝 붙었다. 몽롱한 눈으로 물방울이 흩어진 차창을 한참 바라보았다. 무리를 찾는 물고기 떼가 강변북로를 유유히 나른다. 대부분은 가족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중일 테지. 태하를 야멸차게 밀어냈지만, 집에 도착해도 반기는 이는 하나 없을 터. 내일 아침에 먹을 음식에 대한 계획도 없다. 분홍 구두에 이끌려 정신없이 음악에 미쳐 춤을 추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 조명이 꺼지고, 구두에 질질 끌려가는 듯했다. 차 안을 채웠던 디제이의 멘트가 끝나고 녹턴 19번이 흐르기 시작했다. 겨울이 시작되는 곳에서 작곡했을 법한 서툴고 격한 곡조가 비 내린 가을밤과 잘 어울렸다. 인간의 비장이라는 감정, 환경을 거스를 수 없는 순간에 아련하게 가슴에 차오르는 것. 태생이 송두리째 뒤엉켰다.

‘비나 더 와버렸으면.’

구름이 답답하게 말려있는 하늘을 내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비가 쉬지 않고 내렸다면 우산을 잃어버리지 않고 택시에 탔을 텐데. 태하를 만나기 전에 택시를 탔을지도 모른다. 한차례 또 속이 울렁거린다. 오한이 느껴지자 언젠가 야멸차게 엄마가 이불을 걷어가 버렸던 아침 생각이 났다. 그래도 엄마가 내 편을 들어주었던 게 그날 딱 한 번 있긴 했다.

"니는 밭이나 갈고 소똥이나 치우는 기 딱 맞다."

"내가 빙신이다. 100원 주고 사온 기 뭐 제대로 된 걸 낳았겠노?"

현관문 안에서 새어 나오는 아버지의 목소리. 낙서를 지우고 캄캄한 밤이 돼서야 돌아왔지만, 문을 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걔가 아니라는데 왜 안 믿어요, 왜 내 새끼 말을 안 믿고 얼굴도 못 본 미친놈이 쓴 걸 믿어요…?"

"100원짜리에서 나온 새끼들은 50원짜리 아이가?"

"시오가 왜 50원짜리에요! 당신 새끼잖아요. 왜 그렇게 말해요?"

"다 잊어묵은나. 니 이 집 대 잇자꼬 들어온 거."

현관문 안쪽이 잠잠해졌다.

"아가씨. 정신 좀 차려 봐요. 여기서 어디로 가야 되는지요."

"...네?… 아 죄송해요. 다 왔네요. 여기서 내릴게요."

"아까 남자친구 아닌가? 이왕이면 바래다 달라고 하지. 예쁜 아가씨가 술 마시고 이 시간에 집에 들어가는 거 위험하죠. 날이 추운데 얼른 옷 갈아입고 쉬어요. 아가씨."

택시에서 내린 후에도, 머릿속으로 그때의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엄마는 내 방문을 열고 빙 둘러보더니 조용히 들어오셨다. 잠이 들까 말까 한 상황이었지만, 인기척에 몸이 경직되었다. 눈을 질끈 감고 자는 척을 했다. 술 냄새가 낫다. 한 걸음씩 다가올 때마다 심장이 울렁거렸다. 머리맡에 와서 한참을 내려다보는 것이 느껴졌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혼잣말을 이어갔다.

"고추는 어디다 두고 나왔니 기집애야…”

처음으로 들어보는 다정한 목소리였다. 엄마는 술 냄새를 풍기며 숨을 몰아쉬다가 나를 내려 보고는 머리를 한번 쓰다듬고 나가셨다. 그 순간의 손길은 겨울 창가의 빛처럼 따스했다. 엄마가 방을 나간 뒤, 미동도 않은 채 누워있었다. 멍하니 엄마의 이야기를 되새김질하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자꾸만 흐르는 눈물을 그대로 두었다. 내가 잘한다고 바뀌는 것이 많이 없다는 것을 그날 절실하게 느꼈다.

동네에서 버리는 헌 옷이 내가 언니보다 큰 뒤부터 방 앞에 놓여있었다. 어렸을 때는 어두운 표정과 아버지를 닮은 체격이 영락없는 남자였다. 그때 아이들이 나를 부르던 별명도 ‘남자’. 흔한 여자아이들처럼 윤기가 나고 빗질이 반듯한 단발이나 양 갈래 땋은 머리를 늘여 트려 본 적이 없었다. 엄마는 미장원에 끌고 갔고 ‘무조건 짧게 잘라주세요.’ 늘 이렇게 말했다. 짧은 머리가 길어지면 다듬지 않아 영 머리 모양새가 엉망이었다. 엄마의 손길이 뚝뚝 떨어지는 여자애들을 동경했었다. 말을 걸기도 조심스러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도 그 아이들은 내가 바라보던 시선이 부담스러웠겠다. 멀리서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기만 하던 내가 짧은 말이라도 건네면 차가운 태도를 보였다. 빛이 바랜 헌 옷과 끝이 낡고 해진 가방, 더벅머리의 아이가 레이스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여자아이에게 다가가 어깨에 손을 올린다. 드레스를 입은 공주님은 벌레 보듯 매정하게 팔을 걷어차고 메롱 혀를 날름거린다. 그 긴 혀가 내 목을 조이고 나는 숨이 막혔다.

사회에 나와 외모를 가꾸기 시작할 무렵 간혹 예쁘다는 말을 들었다. 처음 옷 가게에서 옷을 골라 입었을 때 종업원이 잘 어울린다는 말을 했고 그 말이 너무 수줍었다. 맞지 않는 사이즈 옷을 그대로 사버렸다. 머리를 하고 학교에 간 날에는 잘 어울린다는 친구들의 말에 얼굴이 달아오르기도 했다.

택시 기사님이 태하를 보고 남자친구냐고 묻는 말에는 당혹감이 들긴 했다. 아마도 태하를 밀치고 택시에 타는 모습을 멀리서 보았던 모양이다. 젖은 골목길 웅덩이엔 노란 불빛이 반짝거렸다. 술이 다 깨지 않은 상태에서 팔을 끌어안고 뛰다가 미끌거리는 스타킹 때문에 집 앞 계단에서 헛디뎠다. 난간을 잡은 손에서는 녹 냄새가 났다. 발목을 움직이려 하자 통증이 느껴졌다. 가방을 집어 들고 천천히 걸음을 걸어보았다. 걸을 만했다. 구두 안에는 아직도 질척거렸다.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오자 내 냄새와 온기가 느껴졌다. 축축한 옷을 휘청거리며 하나씩 바닥에 벗었다. 반쯤 젖은 스타킹과 팬티는 쉽게 벗겨지지 않았다. 뜨거운 물을 틀었더니 찬물이 왈칵 쏟아지다 점점 따뜻해진다. 정신없이 맞았던 비가 부족했는지 한기가 없어질 때까지 따뜻한 물이 몸을 타고 흐르도록 놔두었다. 머리를 타고 흐르는 물줄기에 머리칼이 엉켜 자꾸 가슴 앞으로 흘러내렸고 손길이 느껴졌다. 태하가 온 힘을 다해 끌어안던 느낌이 생생했다. 허리를 감싸 안았을 때의 숨 막힘에 감정이 들떴다. 태하는 무엇을 더 알고 싶었을까. 침대에 뉘이고 하나씩 단추를 풀어낼 때마다 드러나는 속살 같은 사적인 것들, 우리가 서로에게 더 알고 싶어 하는 부분은 옷 아래 감춰진 맨살의 감촉 같은 것일까.

샤워를 끝낸 후 뻐근한 다리 상태를 비교해보았더니 조금 부어있었다. 하루가 지나면 더 심해질 것 같았지만 아파도 괜찮다. 내일은 특별한 일이 없다. 마음껏 아파도 괜찮다. 아파도 괜찮아. 언니의 전화 내용은 뭐였을까. 덩그러니 방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침대에 새로 꺼낸 팬티만 입은 채 누웠다.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지만, 불행은 나와 같은 속도로 자랐다. 남자들은 내 불행의 언저리에 있었다. 술기운이 약간 남은 상태에서 팬티에 손을 집어넣었다. 나는 100원짜리에서 태어난 50원짜리다. 어린 언니가 귀에 속삭인다.

‘야, 시오. 왜 엄마가 가끔 큰엄마 옷을 입는지 안 궁금하니?’

그전에는 한 번도 그것을 궁금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지만, 엄마와 아버지가 방문을 열었고 언니는 새침한 표정으로 말을 숨겼다. 엄마에게 해파리의 옷은 컸다. 큰 옷을 가끔 꺼내 입는 정도로 생각했었지만 언니의 이야기를 들은 이후부터는 어렴풋이 큰 옷이 묘한 광경으로 보였다. 소매가 손바닥을 다 가릴 만큼 큰 저고리를 입고 자는 날도 있었다. 엄마가 부엌으로 들어가자 입을 꼭 다물고 있던 언니는 부엌을 살피며 내 옆으로 슬금슬금 다가와 귀에 속삭였다.

“엄마는 100원짜리 여자거든."


작가 소개  
조금 어린 나이의 결혼 그리고 빠른 나이의 이혼, 통신회사, 콜센터, 어학원 운영 중 경영악화로 빈털터리가 됨. 2년간 낙오자라는 패배감으로 자폐적인 시간을 보내던 중 무작정 세계 여행을 시작. 1년 정도 해외 여행 중 글을 써야겠다고 결심. 성을 사회적, 문화적으로 조망하는 시와 수필을 SNS에 연재 중이다.

<아스팔트에 핀 꽃> 동인 시집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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