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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 | 알베르토의 문화탐구생활] 모두가 '착한아이' 되는 이탈리아의 12월

중앙일보

입력

일러스트=강일구

일러스트=강일구

한국에 살면서 유독 고향이 그리워지는 시기가 있다. 바로 성탄 시즌이다. 한국에서 크리스마스는 명절이 아니다. 주로 연인들이 선물을 교환하며 데이트를 즐기는 공휴일로 인식돼 있다. 안타까운 것은, 기독교 신자에게 가장 중요한 명절이 전 세계적 ‘성수기’로 둔갑해 본연의 의미를 잃어 간다는 사실이다. 12월이 시작되기도 전에 대형 마트와 각종 상점들은 크리스마스 트리를 장식하고, 어디에 가든 캐럴이 울려 퍼진다. 호텔이나 레스토랑은 크리스마스 ‘대목’을 맞이해 프로모션 준비에 여념이 없다. 빵집에서는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일찌감치 쌓아 두고 판다.

크리스마스는 예수 탄생을 기념하는 날이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기독교 고유의 전통 명절이 아니라는 의견도 있다. 로마 시대에는 12월 25일이 ‘태양의 탄생(Natalis Solis Invicti)’을 기념하는 명절이었으며, 이날 선물을 교환하거나 술을 마시며 축제처럼 즐겼다고 한다. 12월 25일을 예수 탄신일로 기념한 것은 3세기경부터다. 이후 수백 년간 두 명절이 공존하다가 중세에 이르러 후자만 남게 됐다는 설도 존재한다. 이탈리아처럼 4세기 무렵부터 수천 년간 예수 탄생을 기념해 온 가톨릭 국가에서는, 신자가 아닌 이들 사이에서도 크리스마스가 큰 의미를 가지게 됐다. 이탈리아 성탄 시즌은 12월 8일부터 이듬해 1월 6일까지 이어진다. 12월 8일과 24~26일, 1월 1일과 6일이 공휴일이다. 학생들의 방학은 보통 12월 23일에 시작되어 이듬해 1월 6일에 끝난다.

12월 8일은 ‘성모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Concep-tio Immaculata)’라는 날이며, 집집마다 크리스마스 장식을 시작한다. 크리스마스 트리를 꾸미고, 아기 예수의 마구간 탄생 순간을 묘사한 장식인 ‘프레제페(Presepe)’를 만드는 것이다. 이 무렵 거리도 온통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변한다. 아이들이 산타클로스에게 보낼 편지를 크리스마스 트리에 매다는 것도 이 시기다. 이날 이후에는 누군가를 만날 때마다 “본 나탈레(Buon Natale·즐거운 성탄)!”라고 외치며 인사한다. 신기하게도 이 기간에는 대부분의 대인 관계마저 아름다워진다.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에게 줄 크리스마스 카드와 선물을 준비하는 동안 마음은 한껏 유순해진다. 싫어하는 사람에게도 어쩐지 잘해 주게 된달까.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이처럼 성탄 시즌이 시작되면 누구든 ‘착한 아이’가 되고 싶은 의지가 강해진다.

12월 24일과 26일은 의미가 크다. 크리스마스이브에는 가족이 모여 저녁 만찬을 즐긴다. 오후 11시경에는 다 같이 성당에서 미사를 드린다. 한 해동안 한 번도 성당에 가지 않았던 이들마저 이날만큼은 성당을 찾는다. 그런 이유로 자정에는 이탈리아 전역의 성당이 북새통을 이룬다. 미사 후에는 삼삼오오 길가에 모여 따뜻하게 데운 와인과 전통 빵을 먹는다. 크리스마스 당일에는 한국의 설이나 추석처럼 온 가족이 한자리에 모인다. 아침잠에서 깨어난 아이들은 크리스마스 트리 밑에 놓인 선물을 설레는 마음으로 뜯어본다. 26일은 영국 및 영연방 국가에서 ‘박싱 데이(Boxing Day)’라 부른다. 과거 유럽 영주들이 주민들에게 성탄 선물을 나눠 준 풍습에서 유래했으며, 오늘날에는 이때 대규모 할인 판매가 이루어진다. 물론 가톨릭 신자들에게 26일은 최초의 순교자로 기록된 스테파노를 기념하는 ‘성 스테파노의 날’이기도 하다.

성탄 시즌의 대미를 장식하는 1월 6일은 ‘주현절(Epiphany·주님이 나타난 날)’이다. 이탈리아 버전 ‘할로윈 데이’인 셈이다. 1월 5일 밤, 어린이들은 ‘베파나(Befana)’ 할머니가 빗자루를 타고 집집마다 방문할 거라 믿는다. 착한 아이에겐 달콤한 사탕을 주고, 말 안 듣는 아이에겐 검은 석탄을 준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베파나를 위해 와인 한 잔과 간단한 간식을 차려 놓고 기대감에 부푼 채 잠든다. 나도 어릴 때 이날을 무척 좋아했다. 언젠가 이런 일도 있었다. 주현절 아침에 일어났더니 테이블 위 와인잔이 비어 있었고 땅콩·호두는 껍데기만 남아 있었다. 흥분한 나는 베파나의 선물을 확인하기 위해 벽에 걸어 놓은 긴 양말을 뒤졌다. 그런데 석탄이 들어 있는 게 아닌가. 부모님이 장난으로 석탄 모양 사탕을 넣어 둔 것이다. 속상한 마음에 소리치며 울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날 시내에서는 온종일 베파나 축제가 진행된다. ‘1년 동안 일어난 나쁜 일을 다 없애자’는 의미에서, 나무로 만든 커다란 베파나 인형을 불에 태운다. 참고로, 베파나는 이탈리아에만 있는 상징적 인물이다.

한국에서도 성탄 시즌이 크리스마스의 속뜻을 되짚는 시간이었으면 좋겠다. 각자의 마음속에 잠든 성스러운 기운을 일깨우고, 인간의 몸으로 태어난 아기 예수처럼 과거 허물을 벗고 새롭게 시작하는 기회로 삼는 것은 어떨까. 올해 크리스마스가 부디 당신에게 그런 날이기를!

알베르토 몬디 맥주와 자동차에 이어 이제는 이탈리아 문화까지 영업하는 JTBC ‘비정상회담’(2014~) 마성의 알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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