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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남정호의 직격 인터뷰

트럼프, 한·미 FTA 손댈 가능성 작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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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정호
남정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박종근 기자 중앙일보 비주얼에디터

트럼프 전략 연구한 김현종 신임 WTO 상소기구 재판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타결의 주역인 김현종(57·전 통상교섭본부장) 한국외대 교수는 남다른 돌파력과 자신감으로 세간의 이목을 끌어 온 ‘화제의 인물’이다. 2004년 장관급인 통상교섭본부장으로 발탁돼 숱한 난관 속에서 한·미 FTA를 성사시킨 데 이어 유엔 대사, 삼성전자 사장으로도 활약해 화제를 모았다. 그런 그가 최근 또 한번 일을 냈다. 미국의 보이콧으로 장승화 서울대 교수의 연임이 좌절됐던 세계무역기구(WTO) 상소기구 재판관 자리에 치열한 경쟁을 뚫고 지난달 23일 선출된 것이다. 김 교수의 전공은 통상법이나 그의 관심은 여기에 머물지 않는다. 외교관 아버지에 대학 때 국제정치학을 전공했기 때문인지 세계적 현안에 남다른 식견도 갖추고 있다. 그런 그가 지난 반년간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가 당선될 경우 펼쳐질 세계에 대해 면밀히 조사했다. 김 교수가 애써 모은 지혜를 듣기 위해 지난달 21일 그를 만났으며 29일에는 전화로 추가 인터뷰를 했다.

최근 세계무역기구(WTO) 상소기구 재판관으로 선출된 김현종 한국외대 교수는 지난달 21일 “앞으로 들어설 트럼프 행정부와의 협상을 성공시키려면 서로 체면을 세워 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진 박종근 기자]

최근 세계무역기구(WTO) 상소기구 재판관으로 선출된 김현종 한국외대 교수는 지난달 21일 “앞으로 들어설 트럼프 행정부와의 협상을 성공시키려면 서로 체면을 세워 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진 박종근 기자]

미국에서는 누구를 만났나.
“6개월 전부터 기회 있을 때마다 워싱턴을 방문해 트럼프와 가까운 인사들을 포함해 민주·공화당 전·현직 상·하원 의원들과 정책결정자, 싱크탱크 전문가 등과 면담했다. 특히 지난 두 달 동안에는 한 달 이상 미국에 체류했다. 그전에는 2~3주씩 두 번 갔다.”
트럼프의 특징은.
“세 가지다. 그는 예측하기 불가능하다는 비주류 협상가의 전형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본인은 다 알면서도 각료 임명을 놓고 오락가락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둘째는 예상하지 못할 정도로 판을 키운다는 점이다. 셋째로 앞의 두 가지 원칙을 이루기 위해 자기만의 고급 정보를 수집한다는 사실이다.”
그런 트럼프가 대선 공약들을 지킬까.
“당선 후 그가 말하는 톤과 내용을 보면 확 바뀐 것을 알 수 있다. 트럼프는 캠페인 때는 ‘한국과 일본이 핵무장을 해도 된다’고 했다. 하지만 당선 뒤에는 ‘내가 언제 그랬느냐’고 부인했다. 이뿐만 아니라 ‘멕시코와의 국경에 장벽을 세우겠다’고 했다 이제는 철조망으로 바뀌었다. 무슬림의 입국을 차단하겠다는 공약 역시 그의 공식 웹사이트에서 슬그머니 사라졌다. 가장 강조했던 불법체류자 추방 문제도 처음에는 1100만 명을 내쫓겠다고 했던 게 300만, 200만으로 줄었다. 이미 트럼프의 생각이 캠페인 때의 약속과는 많이 달라진 것이다.”
한국 관련 공약도 다 변할 거란 얘기인가.
“주목해야 할 대목은 공약 중에 지키기 쉬운 것과 어려운 게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 안보정책의 기본 틀은 누가 대통령이 돼도 거의 안 바뀐다. 트럼프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만 대외정책 중에서 쉽게 손댈 수 있는 부분도 있다. 바로 통상이다. 이 때문에 트럼프는 가장 먼저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공정하게 고치자고 나올 가능성이 크다. 다음은 환태평양동반자협정(TPP)으로 이는 오바마 정부도 포기한 것이라 부활하긴 어렵다. 그 이후에야 한·미 FTA를 손댈 수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우리가 먼저 추가 협상을 하자고 나서지 않는 이상 그렇게 될 공산은 적다고 본다.”
한·미 동맹은 무사할까.
“마이클 플린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내정자가 이미 ‘한·미 동맹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플린을 비롯한 매파의 주요 관심사는 이슬람국가(ISIS)와 시리아다. 우리 국가 안보는 미국과 직결돼 있다. 이 때문에 미국이 ISIS, 시리아 사태에 얼마나 개입하고 어느 만큼 에너지를 쓰는지 정확히 파악해야 북핵 문제에 대한 대처 수준을 알 수 있다. 미국이 ISIS·시리아를 비롯, 이라크·유럽연합(EU)·중국 등 다른 지역에 더 많이 신경 쓴다면 북핵 문제는 우선순위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
방위비 분담금과 미군 철수는 어떻게 될까.
“트럼프가 고려하는 한국 관련 이슈는 두 가지다. 먼저 주한미군 비용으로 우리가 9000억원, 미국이 1조원을 부담한다. 다음은 한·미 FTA로 미국 측 무역적자는 커지고 일자리가 줄어 자신들에게 불리한 조약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트럼프가 대는 숫자는 서비스 분야에서 100억 달러 흑자와 78억 달러에 달하는 무기 판매 부분이 빠져 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강조해야 한다. ”
어떻게 대처하는 게 좋을까.
“일단 ‘못 올린다’고 버티면서 ‘미군의 한반도 주둔에 따른 혜택도 따져보자’고 받아쳐야 한다. 일본의 보호와 중국의 부상 견제는 미국의 주요 목표라 트럼프에게도 주한미군은 중요하다. 다만 유념해야 할 대목이 있다. 얼마 전 마이크 펜스 부통령 당선자가 뮤지컬을 보러 갔다 관중과 배우에게 모욕을 당했다. 이 소식을 듣고 트럼프가 몹시 화를 냈다고 한다. 그 까닭은 자신이 표방해 온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라는 정신을 이들이 존중하지 않았다고 봤기 때문이다. 여기서 보듯 우리의 희망을 이루려면 미국의 체면을 세워줘야 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이것이고 당신이 필요한 것은 이것이니 서로 잘해 보자’는 식으로 접근해야 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달라.
“설사 방위비 분담액을 올리게 되더라도 핵심적인 반대급부를 챙겨야 한다는 얘기다. 핵폐기물 재처리 허용, 원화- 달러 간 통화스와프 체결, 1단계 위성 발사체 기술 이전, 3000t급 핵잠수함 건조 허용, 800㎞로 묶여 있는 미사일 사거리 확장, 이 다섯 가지를 얻어내면 나름 의미 있다고 본다.”
주한미군 철수가 이뤄지면 어떻게 해야 하나.
“미국이 빼더라도 본토 아닌 괌으로 이전할 것이다. 쉽게 철수하지 못하겠지만 이런 상황이 발생하면 우리는 공군과 해군을 강화해야 한다.”
북핵 문제는 어떻게 될까.
“미국의 바람은 우리가 해결책을 제시하면 이를 따라가는 것이다. 미국이 중국을 압박하는 것도 우리 스스로 해결책이 없는 탓이다. 미국은 한국이 한·미 동맹에서 이탈하는 것을 가장 걱정한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남북 교류를 단절시킨 5·24 조치를 단계적으로 완화하면서 평양과 대화하는 게 바람직하다. 이런 차원에서 다음 대통령 당선인의 첫 해외 방문지는 워싱턴·베이징이 아닌 평양이 돼야 하지 않겠나.”
트럼프가 비상사태 시 이성을 잃고 흥분하면 위험하지 않을까.
“지금 보면 상당히 대통령답다. 가족들, 특히 딸 이방카와 사위 재러드 쿠슈너에게 재량권을 주겠다고 하는 건 합리적으로 일을 처리하겠다는 신호다. 따라서 그가 이성을 잃고 멋대로 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극우 매체 설립자인 스티브 배넌을 백악관 수석고문으로 내정했는데.
“그 직책을 잘 봐라. 그럼 그저 조언만 할 수 있을 뿐 아무런 결정도 내릴 수 없는 자리라는 걸 알게 된다. 트럼프는 자신과 완전히 상반된 생각을 하는 이들을 찾았을 것이다. 나 역시 과거 FTA를 놓고 협상할 때 나와 사고 방식이 완전히 다른 두 사람과 팀을 짰다. 내가 생각하지 못한 걸 알기 위해서였다. 트럼프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는 백악관 외교안보보좌관도 아니고 국무부 장관도 아니지 않은가.”
트럼프가 자신의 말대로 일본을 통해 중국을 견제할 수 있을까.
“그가 부상 중인 중국을 일본을 이용해 막으려 하는 것은 맞는 것 같다. 하지만 일본에 집단자위권을 허용하고 개헌을 통해 전쟁할 수 있는 나라로 바꾼들 중국의 패권국 등장을 막을 방법은 없다. 그저 외환조작국 지정, 반덤핑관세 부과처럼 잠시 기분만 좋게 하는 별 의미 없는 조치를 취할 수는 있다. 그럼에도 이런 방법으로는 어림도 없다. 특히 앞으로 임명될 트럼프 내각의 장관들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중국과 협조할 수밖에 없다. 이런 터라 트럼프 내각 내에서 대중 견제 문제를 둘러싸고 갈등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중국의 부상을 막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실제로 과거에도 ZTE란 중국 회사가 금수 품목으로 지정된 전략물자를 이란에 수출했다 제재를 당했는데 2주도 못 갔다. 미국이 중국과의 불편한 관계를 피하려 했기 때문이다.”
트럼프 등장은 한국에 기회가 될 수도 있나.
“트럼프의 외교안보팀은 전통적인 인물로 채워지지 않을 것 같다. 그러다 보니 틈새가 생길 수밖에 없다. 더욱이 트럼프와는 모든 것이 협상 가능하다.”

통상 분쟁을 담당하는 WTO 안에는 상소기구라는 게 있다. 세계에서 뽑힌 7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이 기구는 1심을 거쳐 올라온 무역 관련 분쟁을 최종 심판한다. 자연히 상소기구의 판결은 한 나라의 산업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처럼 중대한 기구의 재판관 자리를 2012년부터 장승화 서울대 교수가 맡아 왔으며 관례에 따라 연임되도록 돼 있었다. 하지만 돌연 미국이 연임을 반대하고 나서 결국 장 교수는 다른 모든 나라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물러나야 했다. 이런 사연 있는 자리에 김현종 교수가 도전, 결국 쟁쟁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상소기구 재판관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이다.

응모하게 된 계기는.
“국제무대에서 한국인 재판관이 특정 국가 때문에 밀렸다. 가만히 있으면 그 자리를 다른 나라에 빼앗기게 생겼는데 ‘이건 아니다’는 생각이 들어 응모하게 됐다.”
주변에서 권한 건가.
“다들 안 된다고 말렸다. 주요국인 일본·호주 출신의 쟁쟁한 후보가 있었고 선거운동도 늦게 시작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국 출신 재판관이 이미 4년을 했던 터라 또 내가 8년을 더 하면 특정 국가에서 너무 오래 한다는 의견도 없지 않았다.”
그런데도 응모한 까닭은.
“막연히 도전하면 될 거라는 느낌이 있었다. 재판관을 임명할 때는 다양한 경험의 응모자를 뽑는 게 상식이다. 이 기준이라면 내가 될 가능성이 컸다. 나는 그간 변호사·교수를 거쳐 국제기구에서 일했으며 이후 통상교섭본부장과 유엔대사를 역임했다. 최근에는 민간 분야에서도 일했다.”
선발된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나.
“인터뷰에서 꽤 인상적으로 보인 덕분인지 모르겠다. ‘재판관으로서 가장 중요한 자질이 뭐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이 나와 ‘무엇보다 판결문을 직접 작성할 수 있어야 하고, 다음으로 판결문을 간결하게 쓸 줄 알아야 한다’고 답했다. 실제로 나는 미국 법무국에서 일하며 판결문을 쓸 때 새벽 4시에 출근했다. 이런 경력을 언급하며 ‘써본 사람만이 판결문 작성이 얼마나 힘든지 알 수 있다’고 했더니 반응이 좋았다.”
상소기구 재판관으로서의 포부는.
“국격 차원에서 꼭 돼야 한다는 생각에 인터뷰 등에 매달린 터라 관련 업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지 못해 아직 뭐라고 말하긴 어렵다. 그럼에도 한국 출신 재판관으로 부끄럽지 않게 최선을 다해 일하겠다.”

김현종 교수는

민간 출신으로 노무현 대통령에 의해 발탁돼 일약 장관급인 통상교섭본부장까지 오른 통상전문가. 전문지식을 바탕으로 자유무역협정(FTA) 및 다자통상 분야에서 뛰어난 협상력을 발휘했다는 평을 듣는다. 이후 유엔대사, 삼성전자 사장 등을 지냈다. 외교관 아버지를 둬 어릴 적부터 외국 생활을 한 덕에 출중한 영어 실력에 폭넓은 해외 인맥을 구축하고 있다.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국제정치학 학·석사 과정을 마친 뒤 이 대학 로스쿨에서 통상법 박사학위를 땄다. 졸업 후 한국과 미국 법률사무소에서 일했으며 홍익대 교수도 역임했다.

글=남정호 논설위원
사진=박종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