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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25>황철영|여명 <제일장>하늘과 대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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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궁수들이 늘어선 곳곳에 어유(어유)로 불씨를 장만해 두고 쏘도록 하면 될 것입니다. 밤중에 행군하여 적의 숙영지에 바짝 접근하였다가 동틀무렵에 일시에 급습하는 것이 유리할 듯 합니다.
다루에 뒤이어서 덕이도 말하였다. 상겸 박사 설이 말했다.
지금 우리에게 확보된 삼천의 군사는 청구 대읍에서도 이만큼 조련된 젊은 선비군을 가졌던 척이 없을 만큼 대단한 힘입니다. 필시 우리가 동호의 정벌을 마치기도 전에 이 북변의 움직임은 곧 사방 수천리로 그 소문이 퍼져나갈 것이며, 이를 염려하는 다른 부족들을 연합하게 만들거나 아니면 조선이나 예맥이 먼저 손을 써서 군소 부족들을 묶어 대항하게 만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께서는 동호의 정벌이 저들의 동방 대읍인 조양에까지 미치면 곧바로 큰 한에 오르시고 때를 이용하여 군소 부족들의 대표를 모아 강화하도록 하십시오. 그 다음에야 예와 맥의 관경을 넘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덕이 설에게 답하였다.
좋습니다. 우리가 일단 하얀 이리를 점령하고 조양을 들이치기 전까지 상께서는 각 부족들을 방문하시어 회의에 참가하도록 해주십시오. 천호장 검바우는 보병대를 맡아 지휘하고 천호장 온수라는 사수대를 지휘하며, 내가 기병대를 지휘하되 비장은 상의 장자 홀이 맡아주기 바란다. 홀은 나의 친위기 일천 군사 중에서 삼백기를 가려 뽑아 선봉장을 맡고 척후와 유군으로 활용하라. 각 백장들은 비록 하호군과 각 마을 연합에서 뽑혀온 전사들이라 처음에는 서먹서먹 하겠으나, 우리는 모두 청구의 자랑스런 군사이며 옛 자오지 검님의 후손임을 믿고 합심해야 할 것이다. 백장들은 위로부터 내려가는 군령을 어김없이 시행하고 전사들을 보살피라.
출전의 날이 왔다. 말모루 애터에서는 며칠 밤을 새워가며 갖가지 것들이 준비되었으니 병장기 외에도 화전(화전)이 병사들의 전통마다 그득히 꽂혔고, 말안장과 전사들의 허리에는 말린 고기며 굳은 떡이 가죽부대에 잔뜩 담겨있었다. 각개 전사들의 장비는 간편하고 가벼운 것들이었다. 수레와 전차는 동원되지 않았고 말모루 일대의 물산으로는 아직 힘겨운 물건들이었다. 덕이는 예에서의 경험대로 밀집보병이 유목민들의 기병을 궤멸시키는데 아주 적절한 무기인 갈고리 창을 사용하도록 하였다. 기법들은 긴 창대 끝에 상대를 찌르고 동시에 적의 무기를 비틀어 내팽개치기 좋게 만든 갈래 창날을 박도록 하였다. 동검은 그렇게 많지 않았으므로 단병 접전에서 검이 매우 쓸모가 있었지만 돌칼이나 뼈칼은 차라리 쓰지 않도록 일렀다. 그 대신에 날카롭고 단단한 규석을 참나무 몽둥이에 매어 단 도끼를 접전에서 쓰도록 하였다. 돌칼은 부러질 염려가 많았지만 돌도끼는 과감하게 휘두르기도 좋고 한번의 타격에 치명상을 입힐 수가 있었다. 그들은 대를 나누어 먼저 동호의 땅을 잘 아는 다루가 홀이 이끄는 삼백의 선봉군을 안내하여 떠났고 이어서 덕이의 중군이 떠나고 뒤에 검바우와 온수리의 보병대와 사수대가 출발하였다. 말모루에서 곧장 서쪽으로 동호의 숙영지가 있었으며 그 중간쯤에 서북방으로는 그들의 대읍이 있었다. 물론 서남으로 흘러 가는 강을 건너 황야를 가로지르면 지름길이었지만 도중에 동호의 소부대 척후들에게 발견될 위험이 컸다. 그래서 그들은 차라리 남으로 우회하여 강의 남쪽을 따라 거슬러 오르다가 하얀 이리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 도하(도하) 하기로 하였다. 그들의 행군에는 현란한 깃발도 뿔나팔이나 북소리도 없었다. 홀의 선봉대는 먼저 삼십여기의 척후가 나아가면서 전도의 상황을 본대에 알렸고 척후들은 교대하여 나아갔다. 그리고 다시 중군에 전달되었다. 척후대는 가끔씩 몇 가족단위로 이동하는 유목민들을 발견할 때가 있었으며 때로는 백여호에 가까운 영막이 세워진 월동 숙영지를 지나칠 때도 있었다. 물론 행군은 밤에도 계속되었으므로 이쪽에서는 불빛과 소음으로 짐작하였다. 사흘 밤낮이 걸리는 행군동안에 강변을 따라가면서 덕이는 깜짝 놀랐다. 몇 해 안된 사이에 동호족들은 강을 넘어와 수많은 숙영지를 형성해 놓고 있었다. 하얀 이리보다는 훨씬 작았지만 수백호에 이르는 영막이 지어진 마을들이 몇 군데 있었다.
덕이는 하얀 이리의 대숙영지를 급습하고 나서 이들이 연합하면 배후가 위협받을 것을 염려했다.
그래서 덕이는 검바우에게 기병 백여명과 궁수 백여명을 붙여주고 보병은 다시 절반으로 나누어 용병하도록 하여 강의 남쪽에 남겨두었다가 본진의 연락을 받아 인근의 제법 큰 마을들을 쓸어 버리도록 지시하였다. 홀이 지휘하는 선봉대의 척후들이 황혼무렵에 도강하기 마춤한 얕은 여울목을 발견하여 알려왔다. 중군이 건너고 후진의 온수리가 이끄는 보병대와 사수대까지 모두 건너고 나니 한밤중이 되었다. 이제 흰 이리는 바로 지척이었다. 그들은 강변에 키가 넘게 자라난 갈대밭 속에서 굳은 떡과 말린 고기로 요기를 하였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천여걸음 밖에 매복대를 묻어두고 새벽까지 눈을 붙있다. 먼저 대숙영지를 살피러 갔던 정찰병들이 돌아와 보고했다.
동호의 읍은 아직 우리의 움직임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가축을 몰아 넣은 광대한 울타리에는 수직하는 자 몇 명이 보일 뿐이고, 동남폭 낮은 언덕에 파수 십여명이 있습니다.
잘됐군. 그 언덕은 나도 잘 안다. 거기까지 전군이 숨소리도 죽이고 안개처럼 스며들자. 먼저 홀이 군사를 내어 동호의 파수들을 없애라.
덕이의 지시를 받고 홀은 날랜 군사 삼십여명을 뽑아 먼저 보내고 뒤를 따랐다. 동녘이 부옇게 터 가고 있었다. 노랗게 마른 갈대와 그 고장 특유의 시커먼 흙빛은 아침놀에 반사되어 벌겋게 보였다. 멀리 끝도 없이 펼쳐진 들판 가운데 작은 섬처럼 나지막한 언덕들이 보였고 언덕에는 수염 같은 침엽수림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군사들은 허리를 굽혀 갈대밭 사이에 몸을 숨기고 읍의 동남쪽에 방어할 토성처럼 서있는 낮은 언덕을 향하여 올라갔다. 그들은 돌도끼나 짜른 동검을 가졌을 뿐이었다. 파수를 보는 동호족 전사들은 두 무리로 나뉘어 언덕의 양쪽에 배치되어 있었는데 가죽옷을 입고 가죽 방패에 길다란 창을 들고 있었다. 습격하는 군사도 두 무리로 나뉘어 파수들에게 접근했다. 그리고 그들은 일시에 풀숲에서 달려나가 적병 하나에 둘 셋씩 달려들었다. 홀이의 선봉대는 말을 끌고 소리도 없이 갈대밭을 지나 언덕에 아르렀다. 본진과 후진도 언덕 밑에 당도하였다. 덕이는 온수리, 홀이 다루와 함께 언덕 위에서 동호의 숙영지를 관찰했다. 언덕 바로 아래쪽에는 거대한 가축들의 울타리가 있었고 이제 깨어나기 시작한 말과 소와 양들이 나직하게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울타리 너머로 규칙적으로 세워진 가죽 천막들과 삐죽이 솟은 장목의 열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아직 이동은 이른 철인 듯했다. 덕이는 중앙에 세워진 둥근 영막을 가리켰다.
저기가 아마도 이곳 거처일 것이다.
모든 천막들은 한의 깃발이 꽂힌 둥글고 큰 영막을 중심으로 원진을 이루고 있는 셈이었다. 그 너머로는 샛강의 지류가 굽이쳐 지나고 있었다. 사방이 툭 트인 초원에서는 이만한 요충지도 드물 것이다. 덕이가 말했다.
먼저 보병대가 숙영지의 좌우를 막는다. 그 다음에 이 언덕에서 사수대는 화전을 쏘아 온
읍에 불을 지르고 이어서 선봉대가 말을 타고 전열을 잡으려는 적군을 분산 시살하며 저 강의 끝에까지 돌파해 들어간다. 마지막으로 사수대는 말을 타고 반격해올 동호의 기병들을 화살로 쏘아 궤멸시키고, 연이어 우리 중군 기병이 내 인솔에 따라 짓쳐 들어간다. 읍의 반대편까지 갔던 선봉대는 그때에 저 중앙의 한의 영막에서 우리와 합류할 것이다. 좌우의 읍 외곽을 막아선 보병대는 포위망을 뚫고 나가는 동호를 남김없이 섬멸하라. 사수대는 좌우로 나뉘어 보병대를 돕고 끝으로 샛강을 향하여 포진할 것이다. 또한 중요한 것이 있다. 적의 전사들이라 할지라도 항복하면 함부로 죽이지 말라. 가축은 우리의 중요한 재산이니 울타리는 모든 공격 대상에서 제외된다. 공격할 때에도 울타리를 우회하거나 파수보는 자를 모른체하라. 말이나 양 한 마리도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
덕이의 명에 따라 검바우 대신 보병의 절반을 맡은 백장들이 대를 나누어 언덕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 이제는 동호족들이 이목을 발견한다 할지라도 이미 대세에는 별 지장이 없는 노릇이었다. 사수대는 이열로 늘어서서 언덕을 까맣게 메우고 늘어섰는데 열의 군데군데 여유를 부은 모닥불이 타올랐다. 벌써 그때쯤에는 숙영지 아래쪽에서도 고함소리가 들리기 시작하고 천막이 술렁이는 기척이 전해져왔다. 이리저리 뛰어 다니는 동호족 전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온수리가 칼을 빼어들고 외쳤다.
쏘아라!
송진을 잔뜩 먹인 화살끝에 불이 댕겨진 화전이 민들레씨가 바람에 풍기듯이 하늘에 가득 찼다. 화전은 계속 꼬리를 이으며 날아갔고 천막과 마른 덤불들이 흰 연기를 올리며 타오르기 시작했다. 불화살은 끝도 없이 계속 날아갔다. 동호족의 숙영지는 비명과 불길로 뒤집혀진 개미집 꼴이 되어 버렸다. 연기는 곧 인근의 들판을 모두 덮어 강변의 안개와 뒤섞여 버렸다. 유목민들은 말에 올라 싸우러 나올 여유도 없었다. 그들은 제각기 창을 들고 가끔씩 활도 쏘며 갈팡질팡 했다. 덕이가 마상에서 손을 들어 보였고 홀은 삼백의 선봉대 선두에 서서 갈래창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들은 일시에 와아 하는 고함을 지르며 말을 몰아 숙영지를 향하여 달려 내려갔다. 선봉대는 울타리 앞에서 양쪽으로 갈라졌다가 다시 합류하여 줄지어 늘어선 천막들 사이로 달려들어갔다.
그러나 동호족들도 초원에서 사냥과 싸움으로 단련된 부족들이었다. 제각기 천막에서 뛰쳐나온 전사들은 참과 검을 챙겨 들고 열을 갖추었다. 홀의 선봉대는 예정대로 적과 싸우기 보다는 질풍같이 읍을 돌파하여 배후를 끊으려고 주춤거리지 않고 동호족의 열을 뚫고 지나갔다. 그들이 읍 가운데를 지날 때에 연기와 불길로 지척을 분간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사방에서 아낙네와 아이들의 서로 울고 부르짖으며 찾는 비명이 요란하였다.
선봉대가 숙영지의 중심을 통과하자 사수대는 언덕에서 내려가면서 아래를 향하여 활을 쏘았고 그 뒤로 본진의 기병들이 천천히 따라 내려갔다. 울타리를 지나 읍을 향하여 열을 짓고 나서도 사수들은 계속 활을 쏘았다. 동호족들은 원래가 말타고 무리지어 하는 싸움에 능했지만 지금의 이 월동 숙영지에서는 입장이 바뀌어 오히려 그들이 먹이로 삼았던 정착민의 마을과 같은 운명에 떨어져 있었다. 불길이 사그라지고 연기가 웬만큼 걷혀갈 때 덕이는 검을 흔들어 보이고 사수들의 활쏘기를 제지했다. 기병은 사수대의 열을 넘어서 천천히 그리고 차츰 빠르게 숙영지 가운데로 짓쳐 나아갔다. 좌우를 막고 있던 보병들이 함성을 지르며 읍을 죄었다. 강변에까지 진출했던 홀의 선봉대도 덕이의 본진과 합류하기 위해 마주 달려오고 있었다. 사방에서 무기를 버린 자들이 땅에 엎드려 목숨을 구걸했고 가족들을 보호하려고 창을 휘두르며 반항하던 자들은 마상에서 달려나가며 가차없이 갈래창으로 살해하였다. 읍의 다른 방향으로 달아나던 자들도 보병들과 단병 접전을 벌이다가 항복하거나 죽거나 했다. 사방이 가죽 타는 노린내로 가득 찼다. 덕이는 번쩍이는 동검에 피 한방울 묻히지 않고 읍 중앙의 큰 한의 영막 앞에까지 당도하였다. 영막 앞의 빈터는 덕이네 기병들의 인마로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덕이가 달려가자 기병들이 좌우로 갈라서서 길을 내주었다. 그들 정예 선비 전사들은 무기를 쳐들어 흔들며 함성을 질렀다. 좌우로 갈라진 열의 끝에 홀이 기다리고 있었다. 홀은 마상에서 웃고 있었다.
한, 보십시오. 저 자가 이 하얀 이리의 한입니다.
덕이는 홀의 말 아래 무릎 꿇고 앉은 동호족 한의 초라한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덕은 하오로 끌려왔을제 그를 가까이서 볼 수도 없던 신분이었다. 동호 읍 하얀 이리의 한은 팔에 부상을 입었고 얼굴에는 그을음이 시커멓게 묻어 있었다. 머리는 희끗희끗한 초로의 사내였지만 근육은 아직도 힘차고 단단해 보였다. 호랑이가죽으로 만든 소매 없는 저고리와 구리 장식의 띠와 팔에 두른 화려한 장식의 팔찌는 그가 분명히 이곳의 한임을 나타내고 있었다.덕은 그에게 물었다.
네가 이곳의 한인가?
덕이의 곁에 섰던 다루가 동호의 말로 통역하였다. 동호의 한이 말했다.
그렇다. 너희는 누구냐? 우리는 이렇게 침탈을 당할 짓을 저지른 적이 없다. 우리는 너희에게 아무 원한이 없다.
이곳 하얀 이리의 땅이 어떻게 생겨났는가? 너희는 저 대초원의 서북에서 점점 나와서 이 일대 밝 종족의 여러 부족들을 침략하고 괴롭혀서 이러한 읍들과 대읍을 이룬 것이다. 나도 너희들 때문에 온 마을의 혈족들을 잃고 모든 것을 빼앗겼다. 우리는 너희를 침탈할 생각은 없고 다만 잃은 땅과 혈족들을 찾고자 한다. 더 이상 인명을 해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너희가 이 땅에서 얻게된 모든 물산은 우리가 돌려 받기로 하겠다. 그리고 너는 네 부족의 한들과 큰 한에 대한 경고의 뜻으로 죽어야겠다. 대신에 네 가족들은 털끝하나 상하지 않으리라.
덕이는 서슴지 않고 곁에 있던 병사의 창을 들어 동호의 한을 향하여 던졌다. 창은 곧추 날아가 그의 가슴을 꿰고 땅속에 굳게 박혔다. 땅바닥에 사지를 벌리고 누운 사내의 주검은 큰돌의 마지막 모습과 똑같았다. <그림 강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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