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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영 부총재, 구용서 총재와 함께 책임지고 사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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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8호 21면

1966년 10월 31일 방한한 미국 존슨 대통령(앞줄 왼쪽에서 셋째)을 마중하기 위해 나선 박정희 대통령(앞줄 왼쪽에서 둘째)과 장기영 한국일보 사장(박 대통령과 존슨 대통령 사이). 장기영은 한국은행 부총재에서 물러난 뒤 금융계뿐 아니라 언론·정치·체육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다. [중앙포토]

짧은 인생을 불꽃같이 살았던 스티브 잡스는 인생의 명암이 너무나 뚜렷했다. 세계 최고 기업의 최고경영자(CEO)로 부와 명성을 누렸지만, 동료들로부터 배척되어 자신이 세운 회사에서 물러나는 씁쓸함을 맛봤다. 이후 애플사는 더욱 고전했으나 1997년 잡스가 복귀하면서 재도약했다. 멋진 반전이었다. 한국은행의 장기영 부총재(오늘날 부총재보)에게는 그런 반전의 기회가 없었다. 누구보다도 창의적이고 열정적이었으며 너무 일찍 세상을 떴고, 자기가 세운 직장을 스스로 나왔다는 점은 스티브 잡스와 비슷했다. 하지만 장기영은 한국은행으로 끝내 복귀하지 못했다.


1950년 4월 한국은행법이 국회를 통과하자 장기영 조사부장은 수고했던 부하들을 데리고 북한산 우이동 계곡으로 소풍을 갔다. 파릇파릇 올라오는 금잔디에 누워 석양에 물든 구름을 바라보다가 “누구든지 자기가 집을 지으면 그 집에 오래 못산다는데, 한은법을 통과시키고 나니 내가 그런 느낌이 드네”라고 불쑥 내뱉었다. 그것은, 2년 뒤를 내다 본 식스센스였다. 장기영이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외국부 때문이었다. 외국부는 한은법에 따라 ‘외환정책’을 수행하기 위해서 신설되는 조직인데, 그 뿌리는 1949년 2월 조선은행에 흡수된 조선환금은행이었다. 환금은행의 직원들은 대부분 조선식산은행 출신이었고, 그들은 외환업무의 특수성을 내세우며 한국은행에 동화되기를 거부했다.


외국부를 책임지며 장기영의 대척점에 선 사람은 김진형이었다. 그가 유학했던 일본에서는 요코하마정금은행(橫濱正金銀行)이 일본은행을 제치고 외환분야의 중앙은행 역할을 했다(지금도 일본은행의 업무는 내국환에 국한된다는 생각이 강하다. 그래서 외환시장 개입이나 외국 중앙은행과의 통화스와프계약 같은 일을 일본 정부가 결정한다). 일본 금융시스템에 익숙한 김진형은, 조선환금은행이 한국은행에 합병되는 것과 금융통화위원회가 외국부를 지시·감독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외국부 예외주의’를 주장했다.

1950년 6월 7일 한국은행 도쿄지점 개점식. 금융계 최초의 해외점포다. 일본과 외교관계가 없었음에도 구용서 총재와 장기영 조사부장이 발로 뛰어 세운 이 지점 덕에 한국전쟁 때 외부세계와 자금 통로를 유지할 수 있었다. [사진 한국은행]

[전쟁으로 도쿄지점서 외환거래 도맡아]
북한산 소풍을 다녀오고 며칠 뒤 장기영은 구용서 총재와 함께 도쿄로 향했다. 연합국 최고사령부(SCAP)로부터 도쿄지점 설치를 허락받기 위해서였다. 서울의 미 경제협력처(ECA)는 일본과 국교가 단절돼 있어 시기상조라고 말렸지만, “대일 무역이 나날이 확대되고 있어 도쿄에서 외환업무를 취급할 일이 많다”며 SCAP를 직접 찾아가 설득했다. 그 덕에 1950년 6월 7일 도쿄지점이 문을 열고 외환전문가인 김진형이 도쿄 주재 부총재로 임명됐다.


며칠 뒤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이튿날인 6월 26일 구용서는 외국의 거래은행들에게 본점의 외환업무 중단을 통보했다. 혹시라도 자신이 북한군에 붙잡혀 고문 끝에 외환보유액을 넘기게 될 가능성을 차단하려는 조치였다. 이로써 외환보유액 관리의 실질적 권한이 김진형에게 넘어갔다. 거기에 더해서 6월 29일부터는 새로운 화폐의 인쇄와 공급 책임도 김진형에게 맡겨졌다.


일본에서 인쇄된 은행권은 노스웨스트 항공사를 통해 수송했다. 그런데 1·4후퇴가 시작되면서 이 항공사가 그 동안 밀린 운송료를 독촉했다. 총액 2만4000달러는 당시 엄청난 거액이라서 이를 지급하려면 대통령의 허락이 필요했다. 하지만, 대통령이 그런 결재를 싫어했기 때문에 김진형은 본점으로 공을 넘겼다. 구용서 총재가 고민에 빠졌다.


그 모습을 보고 장기영이 나섰다. 그는 스티브 잡스처럼 남들이 생각지 못한 것을 생각해내는 사람이었다. 때마침 부총재로 승진해 총재를 도우려는 마음이 샘솟고 있었다. 장기영은 은행권 수송을 마치고 도쿄로 돌아가는 직원에게 암시장에서 구한 미군 군표를 쥐어 주고 그것으로 운송료를 갚도록 했다. SCAP이 주둔한 일본에서는 그것이 법화의 효력이 있다는 점을 착안한 것이다. 그런데 재수가 없었다. 입국 현장에서 발각되어 직원은 억류되고 군표는 압류됐다. 외교관계가 없는 한국의 민간인이 일본 당국에 신고도 하지 않고 군표를 반입하는 것은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었다.

[김진형 도쿄주재 부총재 권한 커져]

연합군 최고사령부가 발행한 군표. 한국은행은 1·4후퇴 때 미군이 평안도에서 분실한 2만4000달러의 군표를 암시장에서 사들였다가 한·일 간의 분쟁을 초래했다.

며칠 뒤 유엔군 최고사령부는 조사를 끝내고 직원과 군표를 돌려줬다. 하지만 ECA 측의 엄중한 항의를 받은 대통령은 진노했다. 국제법을 전공한 자신이 한국은행 때문에 국제적으로 망신당했다고 느낀 것이다. 그래서 현지책임자를 호출했으나 김진형은 본부의 책임이라면서 또 발을 뺐다. 결국 천병규(훗날 재무장관) 도쿄지점장이 소환됐다. 다짜고짜 고함치는 대통령의 소매를 붙잡고 천병규는 무릎을 꿇은 채 전말을 읍소했다. 그때서야 대통령의 화가 풀렸다.


그런 사태를 초래한 장기영은 법률이나 규정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인물이었다. 부산에 피난 온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생활고에 허덕이는 것을 보았을 때도 그들의 직장만 보고 무담보 가계대출을 지시했다. 한은법상 금지된 일이지만, 지도층 인사들의 좌경화를 막는 것이 급선무라는 이유였다. 그런데 변영태 외무장관(시인 변영로의 형) 이외에는 제대로 갚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도 장기영은 웃어 넘겼다. 떼인 돈을 체제유지비용 쯤으로 생각한 것이다.


파격을 서슴지 않는 장기영의 주변에는 청탁이 끊이지 않았다. 주로 외화대출 청탁이었다. 당시 한국은행은 중석불(중석 수출대금)·종교불(종교단체의 구호자금)·고철불(고철 수출대금)·수산불(수산물 수출대금)·수입불(생필품 수입자금) 등 출처와 용도별로 외환을 까다롭게 통제했다. 수입품 가격이 나날이 뛰고 있어서 하루라도 빨리 외화를 대출받고 하루라도 늦게 상환하면 큰 이익이 됐다. 업자들은 말이 잘 통하는 장기영에게 몰려갔다.


당시 한국은행은 심계원(오늘날의 감사원)의 감사만 받도록 되어 있었다(최초의 한은법 제33조). 그런데도 1951년 12월 재무부 감사관 2명이 도쿄지점에 들이닥쳤다. 그들은 장부를 샅샅이 뒤진 뒤 일부 외화대출이 장기간 회수되지 않은 점을 발견하고 특혜라고 몰아붙였다. 구용서 총재는 당황했지만, 한은법 상 그것이 해임의 사유는 될 수 없었다. 하지만 대통령의 호출을 받은 뒤 1951년 12월 18일 사임했다. 한은 총재 중도퇴임 역사의 시작이었다.

[장기영, 석달 버틴 끝에 한은 떠나]
사태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백두진 재무장관은 후임 총재 김유택을 통해 장기영의 사표까지 받아오라고 했다. 장기영은 조선은행 입사동기인 백두진에게 서운함을 느끼면서도 김진형을 의심했다. 무역업자들이 장사진을 이루는 도쿄지점의 수많은 대출 중에서 유독 자신과 관계된 몇 건만 문제라는 것이 말이 되는가? 장기영은 표적감사라고 항변하면서 자신이 지시한 외화대출은 특혜가 아니었다고 버텼다. 휴가를 쓰면서 석 달씩 사표 제출을 미뤘다. 그러나 후임 총재의 통사정 끝에 1952년 3월 결국 물러났다.


그 사태에 대한 김진형의 해석은 달랐다. 훗날 총재가 된 김진형은 “장기영의 대담성은 남의 눈에 거슬리기에 충분했다”고 은근히 깎아내렸다. 장기영의 퇴임 이유는 특혜성 대출이 아니라 그 이전 군표반출 사건에서 드러난 불법에 있었다는 뜻이다. 그 소리를 전해들은 장기영은 김진형의 총재시절 한국은행에 발길을 딱 끊었다. 그가 한국은행을 다시 찾은 것은 4·19 혁명으로 김진형이 구속된 뒤였다. 혁명정부가 김진형에게 붙인 혐의는 공교롭게도 특혜성 불법대출이었다. 그때 장기영은 속으로 웃었겠지만, 이미 한국일보사의 주인이 되어 있어서 한국은행에 복귀할 수는 없었다.


1952년 3월 장기영의 퇴임은 한국은행 안의 헤게모니 싸움에서 조선은행파가 식산은행파에게 일격을 맞은 사건이었다. 그 헤게모니 싸움은 ‘외국부 예외주의’에서 출발했다. 식산은행파가 포진한 외국부는 정부가 결정한 환율로 무역업자들에게 환전이나 대출하는 일을 담당했다. 이는 외환정책이라고도 할 수 없는, 평범한 외환업무에 불과했다. 다만 외환이 워낙 부족하여 외국부가 모든 외환업무를 독점하고 있었을 뿐이다(외환집중제). 독점을 이유로 외국부가 금융통화위원회의 지시·감독에서 예외가 된다면, 발권부도 예외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조선은행파 장기영은 식산은행파의 외국부 예외주의에 저항했다.


하지만 장기영의 퇴진과 함께 외국부 예외주의가 한국은행을 엄습했다. 오늘날 미 연준(Fed)은 중앙은행 간 통화스와프 거래를 통화정책으로 보고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를 통해 의결하는데, 한국은행은 통화정책이 아니라는 이유로 총재가 결정한다. 한국은행의 통화스와프 계약 추진계획을 기획재정부가 발표하기도 한다. 김진형과 일본식 사고방식이 한국은행을 지배하는 것이다.


한편, 새로운 재무장관과 한국은행 총재는 경제를 좀 더 길게 보기 시작했다. 전쟁이 길어지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다음 이야기의 주제다.


차현진 한국은행 인재개발원장hyeonjin.cha@bok.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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