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의 삶' 접은 여고생… 임신 숨기고 "차라리 죽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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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1일 오후 벽제 화장장. 전날 임신한 것을 비관해 친구와 아파트 15층에서 동반 투신 자살한 金모(17.S여상2)양의 시신이 한 줌의 재로 변했다. 딸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본 부모는 목놓아 울었다. 돈이 없어 딸의 빈소조차 마련 못한 가난한 부모다.

친구들도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귀여운 외모와 활발한 성격으로 친구들 사이에 '인기 짱'인 金양이었다. 그러나 그런 金양의 겉모습 뒤에는 말 못할 사연과 어두운 그늘이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인 1998년 金양은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가족과 떨어져 남의 집에 맡겨졌다. 친구들에 따르면 金양은 그 집에서 사실상 가정부 일을 하면서 받은 돈으로 학비를 댔다고 한다. 고단하고 희망없는 답답한 나날이 계속되면서 金양은 술.담배를 배웠다. 가출도 하기 시작했다. "죽고 싶다"는 말도 입에 달고 다녔다.

몇년 뒤 형편이 조금 나아져 金양 가족들은 반지하 단칸방에나마 다시 모였다. 金양도 마음을 고쳐먹고 디자이너를 꿈꾸며 실업계 고교에 진학했다.

다시 먹구름이 찾아온 건 지난 6월 말. 한 달 전 친구 소개로 만난 남자친구와 어쩌다 성관계를 가졌다. 그리고 자살 전날인 지난달 30일 산부인과에서 임신 진단을 받았다.

친구들이 낙태를 권했지만 "생명을 어떻게 지울 수 있나. 학교를 그만두더라도 낳아야 하지 않느냐"며 괴로워 했다. 친구 吳모양은 "죽는 날 자기의 임신으로 모처럼 이뤄진 가족의 행복이 깨질까를 가장 두려워 했다"고 전했다.

金양은 '못난 딸을 용서해주세요. 다시 태어나도 부모님의 딸로 태어나고 싶어요'라는 유서를 남긴 채 자살을 택했다. 꿈과 희망을 가꿔나갈 사춘기를 시련과 좌절로 보낸 한 소녀의 짧은 생을 주변에선 안타까워 했다.

이철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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