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 배신한 대통령”…집단 트라우마 시달리는 ‘하야 세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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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실 국정 농단 사회 전반 번지는 분노·좌절

지난 5일 열린 박근혜 대통령 퇴진 촉구 제2차 촛불집회 참가자들이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박근혜는 하야하라’고 쓴 피켓을 들고 앉아 있다. 박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며 전국적으로 이어지고 있는 촛불집회에는 상식이 붕괴된 사회에 대한 분노와 절망감을 느끼는 학생 등 청년층이 대거 참여하고 있다. [사진 박종근 기자]

지난 5일 열린 박근혜 대통령 퇴진 촉구 제2차 촛불집회 참가자들이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박근혜는 하야하라’고 쓴 피켓을 들고 앉아 있다. 박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며 전국적으로 이어지고 있는 촛불집회에는 상식이 붕괴된 사회에 대한 분노와 절망감을 느끼는 학생 등 청년층이 대거 참여하고 있다. [사진 박종근 기자]

대기업 4년차 직원 김모(26·여)씨는 최근 이직을 결심했다. 회사가 수십억원을 미르·K스포츠재단에 낸 것 때문이다. 그는 “직원에겐 수당 몇 만원도 아까워하는 회사가 대통령 한마디에 내가 평생 벌어도 구경 못할 큰돈을 줬다는 걸 알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고 말했다.

문체부 간부들 줄줄이 쫓겨난 현실
공직사회 “이러려고 공무원 됐나”
전문가 “박탈감 오래두면 우발범죄”

최순실 사태로 분노와 허탈함에 빠져 있는 국민이 많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는 이른바 ‘순실증(국정 농단 사태로 우울감·무기력감을 느끼는 증상을 일컫는 신조어)’을 호소하는 글이 쏟아지고 있다. 이나미 신경정신과 전문의는 “전 국민이 집단적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는 것 같다”고 진단했다.

특히 청소년과 젊은 층의 충격이 크다. 대통령의 탈법 행위를 목도했던 중·장년층과 달리 대통령이 범죄에 연루돼 퇴진을 요구받는 상황을 처음 겪기 때문이다. 대학생 이모(22)씨는 “대통령에 대한 믿음, 정부에 대한 신뢰, 국가에 대한 기대가 동시에 무너지고 있다”고 말했다. 인터넷에서는 청년층이 자신들을 ‘하야 세대’라고 부르고 있기도 하다.

정유라(20)씨가 고교·대학에서 각종 특혜를 누렸다는 사실은 젊은 층에게 상실감까지 안겨 줬다. 취업준비생 박모(27)씨는 “해외 취업 기회를 알아보고 있다. 이 나라에선 노력해 봐야 소용없을 것 같다. 한시라도 빨리 떠나고 싶다”고 말했다. 경기도 소재 고교 2학년인 박모(17)군은 “명문 대학에는 빌딩 하나 정도 세워 줘야 들어갈 수 있다는 선생님의 농담이 진짜처럼 들린다”고 했다.

국민적 분노의 밑바닥에는 ‘상식의 붕괴’에 따른 충격이 깔려 있다. 서이종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대통령이 아니고 누군가의 조종을 받는 ‘꼭두각시’였다. 이런 상식의 배신이 불신시대를 만들고 있다”고 분석했다. 회사원 박모(31)씨는 “설마설마했던 일들이 하나씩 사실로 드러나면서 세상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고 있음을 느낀다. 회사 윗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보수적인 얘기를 하면 귀를 막게 된다”고 말했다. 불신 풍조가 기업 등의 일반 조직에도 퍼지고 있다는 의미다.

평등·공정 등의 가치가 철저히 무시됐다는 점이 분노의 한 원인이다. 건설사 직원 최모(37)씨는 최근 한 은행에 전화해 대출 담당자와 다퉜다. 정유라씨가 그 은행에서 3억원의 대출을 받으면서 0.8% 금리를 적용받았다는 보도를 본 직후였다. 최씨는 “‘내게도 같은 금리를 적용해 달라’고 했으나 거절당했다. 화가 나 견딜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윤평중 한신대 철학과 교수는 “최순실 패거리는 우리 사회에서 당연히 지켜야 할 상식적 가치들을 철저히 유린했다. 한국 사회의 밑동부터 파괴시켰다”고 지적했다.

젊은 공무원들도 상식 붕괴로 인한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최순실 모녀 문제에 원칙적으로 대응한 노태강 전 문화체육관광부 체육국장, 진재수 전 체육정책과장이 박근혜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강제로 공직에서 쫓겨난 현실 때문이다. 정부부처 공무원인 배모(33)씨는 “문체부 간부들의 일이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며 박 대통령의 담화를 흉내 내 “내가 이러려고 공무원이 됐나 하는 생각에 자괴감이 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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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은 이번 사태를 빨리 극복하지 않으면 큰 혼란이 올 수 있다고 경고한다. 서이종 교수는 “국민의 심리적 박탈감이 장기화되면 우발적·극단적 범죄 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신광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정치 지도자들이 지금처럼 손익 계산에 바쁜 모습을 보여 주면 젊은이들의 상처는 치유될 길이 없다”고 지적했다.

글=박민제·홍상지·윤재영 기자 letmein@joongang.co.kr
사진=박종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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