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 김 부총리 주재로 "대타협"|농가부채 경감책 나오기까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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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오랜 진통끝에 나온 농어가 부채 경감 대책이라 정책 입안 과정에서 사연도 많고 개중에는 그저 지나간 이야기로 넘기지 못할만큼 의미심장한「기록」으로 남겨야할 부분도 있다. 이번 대책은 결국 행정논리가 정치논리에 완전히 압도당한 큰 선례를 남긴 셈. 지난11일 광화문 1청사 부총리 집무실에서 김만제 부총리, 정인용 재무장관·황인성 농림수산부장관·사공일 청와대 경제수석이 모여 청와대보고를 앞둔 부처간 「대안협」을 보자 일부 부처에서는 『그것은 우리 장관이 타협을 본 것이지 우리 부처가 동의해준 것 아니다』는 말이 나왔을 정도. 또 정부부처내의 한 고위관계자는 정책입안이 막바지단계에 이르자 『이번처럼 행정의 한계를 절감해 본적이 없다』고 허탈한 표정을 짓기도.
입안단계에서부터의 이견과 진통은 농어촌대책이 당간의 부채경감쪽으로 가야하느냐, 아니면 농외소득원 개발로 줄기를 잡아야 하느냐하는 기본적인 시각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
여기다 정책검토 과정에서 과연 농가부채가 어느정도로 심각한 문제냐하는 의문까지 제기되어 정책입안자들을 더욱 곤혹스럽게 만들었다는 것.
일부 경제부처에서는 사채대환용 1조원의 자금을 농공지구개발에 집중시킨다면 농어가에 훨씬 더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하는 반론을 제기하기도.
경제기획원은 부처간 정책공방이 한창이던 지난달 초순 실무자급들을 여러명 농촌에 내려보내「사랑방 토론」등을 통한 실정파악 결과 『농어가가 정말 심각하게 여기고 있는 것은 부채문제 보다도 장래의 소득불안이다』라는 결론까지 얻었으나 정책의 큰 줄기를 틀어잡기에는 이미 역부족이었다는 자평.
민정당의 정치논리를 등에 업은 농림수산부와의 정책공방에서 재무부는 시종일관 별다른 적극성을 보이지 않아 경제기획원측은 다소 섭섭한 눈치. 모든 파격적인 지원대책이 그렇지만 이번에도 부채경감대책의 「밑천」은 결국 재정에서건 금융에서건 뭉칫돈들을 풀어 대야하고 금리체계의 왜곡도 피할 수 없는 노릇인데 재무부는 일찌감치 대세를 읽었는지 통화나 금리면에서 별다른 「입장고수」가 없었던 것.
한은특융 부분은 재무부실무자들은 물론 심지어 한은의 아무하고도 사전협의가 전혀 없이 대책발표와 함께 일방적으로 「기정사실화」돼버린 부분이라는 것. 청와대보고와 대책브리핑이 있던 지난 13일하오 박성상한은총재가 과천 제2청사에 나타나 김부총리등과 요담, 그때야 비로소「특융」을 통보받지 않았는가 하는 추측을 낳게하기도.
농협에 한은특융이 나가려면 현재의 규정으로는 길이 없는지라 한은은 곧 금통위에서 금통위창들의 「양해」를 얻어 총재권한으로 새로운 규정을 만들어야만 할판.
지난85년 해외건설정리를 위한 특융이 나갈때는 그래도 특융집행과정상 밀고 당기는 논의라도 있었으나 이번 농가특융은 말 그대로 한마디 「통고」로 떨어져 내려온 것이라 한은 실무자들은 오히려 어안이 벙벙하다는 표정들.
한편 재무부는 2천5백억원의 특융이 통화관리에 미칠 심각한 부작용을 의식, 요즘 다른 부문에서 통화를 거두어들일 대비책 마련에 고심중.
아직도 부처간 협의와 조정이 더 있어야 할 부분은 이번 대책의 밑천부담을 어느 부분에서 얼마큼씩 나누어 질 것이냐 하는 문제.
하기야 그많은 뒷돈을 재정 또는 금융 어느 한쪽에서 모두 부담할수도 없는 일이니 이제부터는 주로 기획원과 재무부가 서로 부담분을 놓고 한참 입씨름을 하게 생겼는데 이번 자료에는 자금의 「소요」부분은 명확히 되어있으나 자금의 「조달」부분은 한줄도 들어있지 않았다.
지난 일은 지난 일이라 치고 이제 앞으로 걱정이 되는 것은 농어가쪽에 이만한「선물」을 안겨주었으니 다른 사회계층에서 더욱 거센 「요구」가 터져나올 경우 어떻게 대처할 것이냐는 문제.
예컨대 도시영세민·저소득근로자 계층등에 대해서도 좀더 혜택폭이 큰 대책이 나와야하지 않겠느냐는 소리가 벌써부터 나오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도 역시 『요구가 있다고 다 들어주느냐』는 행정논리와 『그쪽은 표밭이 적으냐』는 정치논리가 벌써부터 맞서는 양상.
정치 계절을 앞두고 아마도 가장 큰 호재일터인 이번 대책에 민정당이 전면에 나서지않고 농림수산부가 발표하게 된 것을 놓고 일부에서는 웬일이냐는 표정.
그간 무슨 생색을 낼만한 건이 있으면 일부러 당정협의를 열어서라도 최소한 정부·여당의 공동작품으로 만들어가려는 것이 민정당의 모습이었는데 이토록 큰 건을 왜 농림수산부에 넘겨주게 되었느냐는 것. 더구나 이번 일이야말로 실제로 민정당이 「열심히」밀어붙여 탄생시킨 것임에도 불구하고 최종발표에서 당이 빠진것에 대해 일부에서는 민정당도 때로는 공을 다른데로 돌려야할 경우가 생기는 모양이라고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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