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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 영화 감독이자 설치미술가 박찬경 감독. 그의 작업실을 방문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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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소식이 뜸했던 박찬경(51) 감독을 만난 건 제5회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10월 15일~12월 15일, Anyang Public Art Project, 이하 APAP) 때문이었다. APAP는 경기도 안양에 위치한 안양예술공원 일대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공공예술 트리엔날레로, 국내외 유명 작가들의 공공예술 작품 전시와 다양한 이벤트가 열리는 축제다. 박 감독은 올해 APAP의 트레일러 연출을 맡았다. 이번 트레일러는 2005년 APAP 개막 이래 처음 제작한 것으로 네 가지 버전(15초·30초·1분·3분)이다. 드론을 띄워 안양을 대표하는 공공장소인 안양예술공원을 담은 모습이 인상적이다. 9월의 어느 흐린 날, 서울 서촌 근처 고즈넉한 곳에 위치한 그의 작업실을 찾았다.

APAP를 계기로 요즘 어떤 작품을 준비 중인지 궁금해 찾아왔다. 우선 묻고 싶은 건, 안양과의 인연이다. 이번 APAP의 트레일러를 연출했을 뿐 아니라, 6년 전엔 다큐멘터리 ‘다시 태어나고 싶어요, 안양에’도 만들었는데.
 “안양과 처음 연을 맺은 건 2010년이었다. 제3회 APAP가 열릴 당시, ‘안양에 관한 영화를 만들어 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그때 안양에서 서너 달 정도 지내며 다큐 ‘다시 태어나고 싶어요, 안양에’를 완성했다. 이 작품이 여러 영화제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는데, 정작 안양에서는 제대로 상영할 기회가 없었다. 그러다 이번 APAP의 주은지 예술감독이 ‘이 다큐를 안양에서 상영하자’고 하더라. 그와 동시에 트레일러 연출도 맡게 됐다.”
트레일러는 미술·영화 작업과 또 다르지 않나.
“물론이다. 올해 APAP에 관한 답을 준다기보다 궁금증을 유발해야 하니, 오히려 어려운 것 같다. 내 색깔이 들어간 ‘작품’으로 트레일러를 만들고 싶었다.”
드론을 사용해 안양천을 중심으로 안양예술공원을 찍은 이유라면.
“6년 전 다큐를 만들 때, 안양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 바로 ‘안양천’이란 걸 알게 됐다. 안양천에서 휴식을 즐기는 시민이 정말 많다. 이곳은 아주 오랫동안 주민들에게 사랑받아 온 휴식처이자 문화 공간이다. 이 풍경을 제대로 보여 주고 싶었다. 드론을 띄우고, 현란한 편집 대신 롱테이크로 촬영한 이유다. 사람이 많은 곳에 드론을 띄워야 해서 안전 문제가 생기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전문 기술자들이 워낙 조심스럽게 진행해 하루 만에 무사히 촬영을 끝냈다.”
영상에 삽입된 시민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인상적이다. 이 축제의 주제가 ‘공공예술’임을 상기시킨다.
“실제 시민들의 목소리를 넣고 싶었다. 안양예술공원에서 직접 녹음했다.”
APAP를 꽤 오랫동안 지켜봐 온 셈인데.
“예산 규모로 보면, 광주비엔날레와 맞먹는다. 그만큼 안양시에서 굉장히 공들이는 행사다. 소란스럽지 않으면서 내실을 갖춘 점도 큰 매력이다. 미술 전시는 어디에나 있고 자주 열리지만, 공공예술을 다루는 자리는 드물기에 더 특별하다. 수준 높은 작가들도 많이 참여하는데, 이번엔 임흥순 작가 겸 영화감독의 작품이 가장 궁금하다.”
대중과의 접점을 항상 염두에 두는 것 같다. 비영리 대안 전시 공간을 직접 운영하기도 했고, 오랫동안 미술을 하다 영화로 보폭을 넓힌 것도 그 때문 아닌가. 당신이 생각하는 ‘공공예술’이란 무엇인가.
“공공예술의 시작은 조각 작품이었다. 그러나 ‘작가들의 작품을 공공장소에 아무 맥락 없이 던져 놓는다’는 비판이 나오기 시작했다. 작가가 추구하는 예술적 가치를 시민의 생활 속에 잘 녹아들게 실현하는 것이 중요한데, 그게 쉽지는 않다.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더욱 고민하고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다.”
공공예술을 잘 품은 도시는 어디일까.
“유럽이나 미국의 웬만한 도시에는 수준 높은 공공예술 작품이 많다. 미국 뉴욕의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는 예술적으로 성공한 프로젝트다. 그에 비하면 서울엔 흉물이 널려 있는 것 같다.”
예를 들면.
“건물 앞에 하나씩은 있는 듯하다(웃음). 맥락도 아름다움도 없다. 대표적인 것이 광화문 광장의 세종대왕 동상이다. 너무 크고 남성적이다. 아직도 많은 사람이 공공예술을 국가 권력의 상징이자 기념비적인 것으로만 여긴다.”

박 감독이 ‘공공성’ 그리고 ‘공공예술’을 깊이 고민하는 건, 사실 특별한 일이 아니다. 다큐 ‘만신’(2014)을 통해 민속 문화를 탐구하기도 했지만, 그가 미술과 영화를 넘나들며 한결같이 고민한 것은 바로 ‘사회 안에서의 인간’이었다. 그중에서도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 파독 광부·간호사 등 현대사의 아픔에 특히 주목해 왔다. 그가 내년 3월 국제갤러리에서 열릴 개인전에 내놓을 작품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박찬경 감독, 사진=라희찬 (STUDIO 706)

박찬경 감독, 사진=라희찬 (STUDIO 706)

내년 열릴 개인전에서 ‘시민의 숲’이란 영상 작품을 선보인다고.
“이 작품의 주제는 ‘애도’다. 혼란스럽고 비극적인 한국 현대사에는 이름 없이 죽어간 사람이 너무 많다. ‘목소리가 없는 사람들’에 대해 애도하고 싶었다. 영상 속엔 귀신이 등장하는데, 공포영화 속 그것과는 다르다. 과일도 깎아 먹고 담배도 피우는, 현대인의 (귀신에 대한) 무관심을 익히 알고 있는 귀신들이다(웃음). ”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준다면.
“야산에서 3회 정도 촬영한 작품인데, 전시장에서는 흑백 파노라마 영상으로 펼쳐진다. 두루마리를 펼쳐 보는 듯한 느낌이 들 수도 있다. 그 앞을 천천히 걸으면, 지나갈 때마다 소리가 조금씩 다르게 들릴 거다. 음악은 사운드디자이너 권병준이 맡았다.”
굳이 근·현대사로 가지 않아도, 현재 대한민국 사회에 아픔이 많지 않나. 직접적으로 다루고 싶은 ‘지금, 여기’의 사건은 없나.
“사실 ‘시민의 숲’에는 세월호 참사 이야기가 나온다. 학생들도, 배도…. 현재 남북 분단이 고착화되고 있는 상황도 문제다. 보수 정권 10년 동안 남북 문제가 악화돼 왔고, 사람들은 핵보다 간접 흡연을 더 무서워한다.”
세월호 참사를 다룬 작품들이 모든 예술 분야에서 조금씩 나오고 있다. 예술가로서, 그 아픔을 다루는 태도에 대해 고민이 클 법한데.
 “세월호 참사는 한국 사회의 모든 문제, 근현대 자체를 통째로 반성하게 하는 사건이다. 그것을 제대로 기억하려면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그들이 가진 정보는 놀라울 정도로 풍부하다. 그 목소리를 듣는 게 예술가가 해야 할 일이 아닐까.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사연들을 가진 사람들의 말을 듣는 일.”
그 모든 활동이 ‘예술가’라는 이름 아래 놓인다. 당신에게 ‘예술’이란 무엇인가.
 “술을 좀 마셔야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은데(웃음). 글쎄, 예술이 뭘까…. 이 답답한 세상에서 자유로움을 발현하게 하는 것. 내부로부터 나오는 자유가 어떤 것인지 보여 주는 작업이 아닐까?”
당신은 자유롭나.
“아우, 뭐가 자유롭나. 돈도 벌어야 하고…(웃음). 자유로운 게 어디 있어, 자유로움을 꿈꾸는 것이겠지. 솔직히 지금 같은 세상에선 정치가 예술보다 중요하다. 예술이 핵 개발을 막을 순 없잖나.”
다음 작품은 언제 볼 수 있나.
 “아직 시나리오 단계다. 영화화될지 안 될지 모른다는 얘기다(웃음). 형(박찬욱 감독)의 회사(모호필름)에서 제작하려 했는데, 형이 ‘아가씨’(6월 1일 개봉)로 워낙 바빴다. 난 미술 작업하느라 바빴고. 한 여자가 갑자기 이유를 알 수 없는 증상을 보이면서 환상에 시달리는 이야기다.”
혹시 무병(巫病)인가. ‘만신’ 개봉 당시 ‘주인공 김금화 만신(무당을 높여 부르는 말)에 대한 이야기라면 10년도 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김금화 선생님과는 관계없지만, 무병 이야기는 맞다. 왜 무병을 앓는 이의 대부분이 여성인지 궁금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아무래도 여성의 공감 능력이 남자보다 뛰어나기 때문 아닐까. 우리는 급격한 근대화로 전통의 단절을 겪었지만, 수천 년간 지속된 것은 어떤 식으로든 남아 있게 마련이다. 주로 여성이 무당이 되는 것도 그중 하나일 테고. 그 막강한 전통에 호기심이 인다.”

*이 기사는 매거진M 184호(2016.10.14-2016.10.20)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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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주리 기자 ohmaju@joongang.co.kr 사진=라희찬(STUDIO 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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