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박 대통령 ‘100만 촛불’의 목소리 제대로 듣고 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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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박근혜 대통령 변호인이 검찰 조사 연기를 요청하면서 대면조사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밝혔다. 그는 특히 “선의로 추진했던 일이었고 그로 인한 긍정적인 효과도 적지 않았다”는 등의 ‘박 대통령 심기’를 전했다. 박 대통령이 현 상황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 안이하게 대응하고 있는 것 아닌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진상규명 의지 부족 드러낸 변호인 회견
“주변 관리 잘못” 민심과 괴리된 인식
철저한 특검 수사로 헌정 문란 진실 밝혀야

박 대통령의 변호인 유영하 변호사는 어제 오후 기자회견을 갖고 검찰의 ‘16일 조사’ 요청에 대해 “수사 결과 및 내용이 국정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라며 연기를 요청했다. 유 변호사는 이어 “원칙적으로 서면조사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대면조사 횟수를 최소화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나아가 그는 박 대통령의 인식도 전달했다. “주변 사람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데 본인의 책임을 통감한다” “온갖 의혹을 사실로 단정하고 매도되는 것에 대해 매우 안타까운 심정”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변호인 회견은 박 대통령이 진상규명에 소극적이란 의구심을 품게 한다. 앞서 박 대통령은 지난 4일 대국민 사과를 하면서 “검찰 조사에 성실하게 임할 각오”라고 다짐했다. 하지만 변호인 회견의 강조점은 “대통령이 임기 중 수사와 재판을 받으면 국정이 마비되고 국론이 분열된다”는 데 있다. 더욱이 대통령의 불소추 특권을 거론하면서 대통령의 직무 수행 지장 등을 대면조사 최소화의 이유로 내세운 건 국민의 진상규명 요구를 외면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현 상황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도 민심과 괴리돼 있다는 우려를 지울 수 없다. 그간 언론 보도와 검찰 수사를 통해 박 대통령이 청와대 문건 유출과 미르·K스포츠재단 설립·모금에 개입한 정황이 드러났다. 안종범 전 정책조정수석 등도 검찰 조사에서 대통령 지시가 있었음을 인정했다. 지난 주말 광화문광장에서 시민 100만 명이 촛불을 들고 박 대통령 하야를 요구한 것은 대통령 자신의 국정 농단과 헌정질서 훼손에 분노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와서 “주변 사람 관리를 제대로 못했다”거나 “선의로 추진했던 일”이라고 하는 건 진실을 회피하는 것 아닌가. “대통령이기 이전에 여성으로서의 사생활이 있다는 점도 고려해 달라”는 변호인 요청은 또 무엇인가.

대통령이 진실을 밝히고 시민들의 목소리에 응답하는 것은 헌법이 부여한 의무다. 만일 변호인이 전한 박 대통령의 인식이 사실이라면 ‘질서 있는 퇴진’이나 2선 후퇴도 순탄하게 이뤄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시민들의 분노는 더욱 커지고 정국은 정면 대치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 대통령은 지금이라도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제 박 대통령의 진상 규명 의지가 실망스러운 수준임이 확인된 이상 특검 수사를 통해 진실을 밝혀내는 수순뿐이다. 여야가 합의한 특검 법안은 ▶수사 대상이 모호하고 ▶수사 기간이 지나치게 짧으며 ▶연장 승인권이 대통령에게 있는 등 문제점이 적지 않다. 법안을 보완해 특검이 진실을 철저하게 밝힐 수 있도록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