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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代)를 이은 삼성전자의 오디오 사랑…'귀(耳)'를 사로 잡아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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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삼성전자의 하만 인수를 공개한 미국 하만사의 홈페이지. 삼성전자는 9조원에 미국 음향 전문기업 하만을 인수했다.

삼성전자의 하만 인수를 공개한 미국 하만사의 홈페이지. 삼성전자는 9조원을 들여 미국 음향 전문기업 하만을 인수했다.

삼성전자가 미국 음향 전문기업 하만(Harman)을 80억 달러(약 9조원)에 인수한다고 14일 밝혔다. 하만은 자동차 전장분야 세계 1위 기업이다. 삼성전자는 “신성장 분야인 전장사업을 본격화하고 오디오 사업을 강화하기 위해 하만을 인수한다”고 밝혔다. 이를 두고 삼성전자가 정보통신기술과 자동차를 연결한 ‘커넥티드 카(connected car)’를 신성장동력으로 삼았다는 해석이 나온다.

하만은 사실 자동차 전장분야가 아닌 오디오 업계에서 더 유명한 기업이다. 하만의 대표 브랜드 JBL과 하만 카돈은 스피커 브랜드다. 제임스 B. 랜싱(James B. Lansing)이 1946년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창업한 JBL은 가정용 스피커를 만들며 오디오 마니아들 사이에서 인지도를 얻었다. JBL은 창업자인 랜싱의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재즈와 팝에 특화된 ‘아메리칸 사운드 스피커’로 여전히 인기다.

하만은 JBL보다 7년 뒤진 1953년 미국에서 설립됐다. 시드니 하만(Sidney Harman)과 버나드 카돈(Bernard Kardon)이 창업자다. 하만은 극장이나 야외에서 사용하는 대형 스피커를 만들었다. 그러다 1969년 JBL을 인수하면서 가정용 스피커 시장에 진입했다. 이후 헤드폰 등을 생산하는 오스트리아 AKG를 인수하면서 대형 스피커에서 가정용, 포터블로 이어지는 거대 음향 기업으로 탈바꿈했다.

오디오 기술력을 바탕으로 하만은 2000년대 이후 벤츠 등 자동차 회사와 파트너십을 맺으며 차량 전장부분에 진출했다. 이후 카오디오 시스템에 IT를 결합한 ‘커넥티드 카’ 시스템으로 사업 영역을 다각화했고, 내비게이션, AV(오디오 비디오) 등 인포테인먼트 기술에 투자했다. 인포테인먼트는 길 안내 같은 정보와 음악ㆍ영상 같은 콘텐트 제공을 합친 전자기기 분야를 뜻한다. 하만의 자동차 전장부분 매출은 전체 매출의 65%를 차지하지만 소비자들에겐 여전히 오디오 전문 기업이란 이미지가 강하다.

삼성전자의 오디오 사랑은 이건희 회장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디오 마니아’로 알려진 이 회장은 오디오 사업부를 따로 둘 정도로 음향기기 사업에 적극적이었다. 삼성전자는 1995년 일본 앰프 제조사 럭스만을 인수해 ‘엠페러(emperor)’란 앰프와 스피커를 국내에서 발매했다. ‘우리의 감성에 도전한다’는 캐치 프레이즈를 내건 엠페러(프리+파워앰프)는 96년 발매 당시 소비자가격이 1400만원을 넘을 정도로 고가였다.

삼성전자가 90년대 후반 발표한 엠페러 앰프. 소비자가만 500만원이 넘을 정도로 고가였다.

삼성전자가 90년대 후반 발표한 엠페러 앰프. 소비자가만 500만원이 넘을 정도로 고가였다.

엠페러는 오디오 마니아들 사이에선 ‘불운의 명기’로 꼽힌다. 황제란 이름을 단 삼성전자의 앰프와 스피커는 해외 브랜드가 점령하고 있는 국내 오디오 시장에 과감하게 도전장을 내밀었지만 외환위기가 겹치면서 어려움을 겪었다. 부진한 판매량에 삼성전자는 결국 오디오 사업을 축소했다. 그럼에도 엠페러 앰프와 스피커는 마니아들 사이에서 여전히 중고로 활발하게 거래되고 있다. 엠페러는 고가 오디오 브랜드인 마크레빈슨과의 기술 제휴를 통해 탄생했는데 마크레빈슨은 하만이 보유하고 있는 브랜드 중 하나다.

이건희 회장이 마크렌빈슨과의 제휴를 통해 오디오 사업에 잠시 발을 담갔다면 아들 이재용 부회장은 하만과 마크레빈슨을 인수해 음향기기와 전장사업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삼성전자는 그동안 JBL과의 협업을 통해 JBL 스피커가 내장된 노트북 등을 선보였는데 이번 하만 인수로 자동차 전장부분은 물론이고 스마트폰이나 TV 등 백색가전에도 하만과 JBL의 오디오 기술력이 적극적으로 활용될 것으로 보인다.

이 부회장의 삼성전자는 음향기기에 대한 투자를 늘리고 있다. 사물인터넷과 음성인식 등 새로운 기술 흐름에서 음향기기의 중요성이 다시금 주목받고 있기 때문이다. 미 캘리포니아주에 자리잡고 있는 삼성전자 소유 오디오랩은 최근 인력을 배로 늘렸다. 삼성 오디오랩은 지난 2015년 CES에서 첫 작품인 ‘무지향성 무선 360 오디오’를 선보였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연말 조직개편을 통해 CE(소비자가전) 부문에 AV 사업팀을 신설하면서 오디오 사업을 확장시키고 있다. 하만 인수로 삼성전자는 음향기기 투자에 정점을 찍었다.

삼성전자가 인수한 하만이 파트너십을 맺고 있는 자동차 회사들. 삼성전자는 이를 기반으로 자동차 전장사업에 주력할 예정이다.

삼성전자가 인수한 하만이 파트너십을 맺고 있는 자동차 회사들. 삼성전자는 이를 기반으로 자동차 전장사업에 주력할 예정이다.

이 부회장은 아버지가 실패한 고가 오디오 시장이 아닌 스마트폰, TV 등 기존 사업 분야에 하만의 오디오 기술력을 집중할 것으로 보인다. 집중한 사업 분야가 다르지만 소비자들의 귀를 사로잡기 위해 나섰다는 건 부자(父子)의 공통점이다. 이 부회장이 '황제(엠페러)'를 넘어설 수 있을까. 삼성전자의 새로운 도전이 흥미진진한 이유다.

강기헌 기자 emck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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