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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등대|윤석화 <연극배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아무리 해가 바뀌어도 버리고 싶지 않은, 더욱 껴안고 싶은 생각들이 있다.
그것은 때묻기 쉬운 일상에서도 늘 빛 바래지 않는 작은 소망을 갖고 살겠다는 것이다.
쓰러지고 넘어져도 미소지으면서 두손으로 내가 넘어진 그땅을 딛고 일어서게 하는 힘을 주는 그런 소망이다.
87년이 막 시작된 어느 저녁, 나는 참으로 무감동하게 TV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새해의 시작과 함께 지금껏 버리지 못한 이기심과 미움과 욕심을 아낌없이 버리리라 생각했지만, 도대체 어디부터 시작해야 하는지가 막연해 그저 TV화면에 시선을 주고 있을뿐이었다.
그런데 그 화면을 통해 어지간한 일에는 무감동해진 내마음에 다시 불을 지피는 작은소망을 다시금 생각케하는 조그마한 불씨를 얻은 것이었다.
내게 소중한 불씨를 준 사람은 울릉도의 한 등대지기 아저씨였다.
『내가 보내는 빛과 소리가 올해에도 바다에서 살아야 할 뱃사람들의 눈과 귀가 되었으면싶습니다.』
이것이 그분의 짧고 작은 새해 소망이었다.
그분의 소망을 듣는 순간 오랫동안 꺼져있던 내가슴 속의 등대에도, 바다에도 불이 반짝 들어오는것 같은 감동을 느낄수 있었다. 한점 허영도 없었으며, 과장도 없이 오직 성실하고 정직하게 인내하며 살아온 착한 사람만이 가질수 있는 그런 소망이었다.
그렇다. 소망을 갖는다는 것은 그렇듯이 무엇을 취하려 함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비움으로써, 줌으로써 무언가를 이웃과 나눌수 있는 것이 아닐까.
어느 시인은 소망을 갖는 일처럼 쓸쓸하고 피곤하고 외로운 일이 또 어디 있겠느냐고 했지만, 나는 쓸쓸함과 피곤, 그리고 외로움 속에서도 의연하게 꽃피울수 있는 삶의 힘이 바로 소망이라고 믿고싶다.
마치 램프의 심지를 돋우듯 우리들 가슴에 작은 소망의 심지를 돋우는 일은 새로운 해를 영접하는 예식일 것이다.
그러나 간혹 소망과 욕식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본다. 또 소망과다증으로 소화불량에 걸린 사람들도 보게 된다. 왜 우리는 잔잔한 소망, 소박하고 작은 소망을 꿈꾸는법을 배우지 못한 것일까? 삶의 마디마디에 엎드려있는 어떤 고난과 외로움까지도 작은 소망으로 극복하는 지혜로운 사람이 그립다.
그렇다면 나의 87년 소망은무엇일까? 씨줄에는 메마르지않을 감성을 넣고 날줄에는 언제보아도 좋을 작품(연극)을 넣어서 아름다운 사람, 착한 사람이 되는 것이 나의 소망이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혹시 내가 나이를 헛 먹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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